광고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15)

수선화 ⓶,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1/04/04 [23:26]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15)

수선화 ⓶, (한상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1/04/04 [23:26]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15)
                                                -수선화 ⓶
                                                                                                    한 상 훈(문학평론가)


이번 문학 이미지 15회엔, 1회에 발표했던 ‘수선화’의 2편에 해당된다. 이 글에선 수선화(나르키소스)와 관련해서 많이 알려져 있는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도취)이란 심리학 용어를 중요한 문학적 모티프로 사용한 하창수(1960~)의 단편 「수선화를 꺾다」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작품은 어떤 젊은 여자의 ‘강간 치사’ 혐의를 받고 있는 소설가와 수사관의 대화로 이야기가 시종 진행되고 있는 점에서 ‘희곡적’ 소설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이 객석에 앉아서 무대 위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럼, 문학 속에 ‘수선화’ 이미지가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먼저 말할 점은, 주인공인 ‘소설가’가 수선화의 꽃말 이야기의 주인공 ‘나르키소스’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수사관은 용의자인 소설가에게 거듭 2시간의 행적에 대한 알리바이를 추궁한다. 사내(소설가)는 자기가 취조받고 있는 이 밀폐된 공간 속에서, 어두운 창밖, 녹슨 가느다란 철망, 한숨 소리, 철컹거리는 소리, 벽을 울리며 들려오는 비명 소리, 자신의 붉어진 손목의 피멍 등에서 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남자(수사관)는 사내(소설가)에게 다시 ‘그 손톱’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한다. 그때의 시각은 전철이 끊길 무렵, 사내는 집이 창동역이어서, 의정부 가는 전철을 타고 있던 중이었다. 사내는 그 여자의 옆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손톱을 보았고, 특히 “그 손톱에 낀 때”를 유심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 여자의 손톱을 발견한 것은 경이로운 놀라움이었다고 진술한다. 그러한 발언에 대해 남자는 난 자네 같은 ‘소설가’를 존경한다고 비양거린다. 손톱의 낡은 분홍 빛깔에서 매니큐어로 이어진다. ‘유혹할 만한 빛깔’이었냐는 남자의 물음에, 손톱의 까만 얼룩과 같은 것이 오리털 파카와 청바지의 곳곳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여자는 ‘공단의 근로자’라고 대답한다. ‘공단의 근로자’라는 시각과 ‘유혹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대비를 통해 두 캐릭터의 소통은 쉽게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내(소설가)는 오늘 출판사와 월 백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1년에 다섯 권의 소설을 집필하기로 계약한 것을 떠올렸다고 한다.


“제가 소설이란 것을 쓰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인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그 여자가 아름다움에 관한 한 치명적인 것이랄 수 있는 손톱 속의 때와 검댕이를 훔쳐내지 못한” 것이 어딘지 닮았다 는 발언을 한다.
소설가는 생각한다. 남들 앞에 무방비로 노출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지저분한 외모는 나태한 생활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힘겨운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초라함이 아닐까.
월계역을 알리는 전철의 멘트와 함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사내는 행선지인 창동역까지는 몇 정거장이 남았지만, 나도 모르게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플랫폼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내는 그녀의 손톱에 낀 것은 ‘물감의 찌꺼기’가 아니라, “구로 공단의 봉제 공장 작업실에서 노동을 마치고 누추한 지하 셋방으로 돌아가는 이 시대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는 “반신불수의 남편과 젖먹이 아이”가 있다고 상상했고, 그 상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내의 이러한 발언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설가(예술가)는 남과 다른 ‘예민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 민감한 작가의 자의식이, 그 여자의 궁핍한 삶을 더욱 확대해서 상상하게 했고, 당연히 상대에 대한 ‘연민’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소설가의 내면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휴머니티’가 깔려있다. 하지만 소설가의 그녀에 대한 상상은 시시콜콜한 센티멘탈리즘의 정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내(소설가)는 그녀를 느닷없이 불러 세웠다. 월급은 얼마 받는지를 물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받는 것이 없다고 했다. 사내는 한창 젊은 아가씨의 그녀가 삶에 찌든 중년 여인의 얼굴 같이 느껴졌다. 사내는 출판사에서 받은 백만 원짜리 수표를 주머니에서 불쑥 꺼내, 그녀에게 아무 말 없이 주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수표를 받고나서, 집에서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면서, 몸을 떨고 있었다. 소설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삶조차 허덕거리는 가운데 이루어진 소설가의 이러한 희생적 돌출 행동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그녀에 대한 과도한 온정은 자의식의 과잉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소설가의 정서적 과잉이 바로 ‘나르시시즘’으로 빠지게 되는 결정적 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수선화’가 ‘꺾어지는’ 결말이 예고되는 것이다.
 
소설가의 그 여자에 대한 상상 초월의 경제적 도움 행위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남자(수사관)는 집이 아니라 여관에 가서 그녀를 강간하고 죽이지 않았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내(소설가)는 그녀와 지하철에서 헤어진 후, 월계동에서 창동 주공아파트까지, 걸어서 두 시간을 돌아갔다고 말한다.
 “그런 허구를 자꾸 자꾸만 만들어내서 내게 진술이랍시고 지껄여댄다면, 내가 아무리 문학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디 참고 넘어갈 수가 있겠냐, 이 말이야.”
소설가는 두 시간의 알리바이를 수사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당시의 정황을 진정으로 말하고 있건만, 그는 계속 비웃고 의심할 뿐이다.


이렇게 취조가 진행 되던 중에, 가죽 잠바의 남자가 들어와서 수사관에게 어떤 서류를 내민다. 그는 그것을 보고 실망스런 표정을 짓는다. 즉 죽은 여자애의 시체와 소지품의 지문을 확인한 결과, 사내(소설가)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관은 “이 사건은 강간 치사라는 아주 지독하고 위험한 것이니까”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았다면서, “자넨 나르시스의 신화를 알고 있나? 소설가니까 그쯤은 알고 있을 테지. 물속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해 뛰어들었다가 익사해 버린 불우한 운명의 소유자, 나르시스, 익사한 그 연못가에 피어난 꽃을 그렇게 부른다더군. 우린 그걸 수선화라고 하지. 난 말야, 소설가들이 그런 존재같이 느껴져. 제 모습에 취해 삶을 내던지고, 아니 삶을 송두리째 그르치는 불우한 운명의 소유자...”

이 작품은 박태원(1909~1986)의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처럼 ‘소설가’를 중요 캐릭터로 내세운 ‘예술가 소설’이다. 이러한 유형은 예술가로 살아온 작가의 이상과 현실의 어긋남이 깊이 있게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회와 작가의 불화를 통해, 소설가의 자조와 패배의식, 또는 현실이라는 지층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는 예술가의 유년기적 순진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선화의 꽃대궁이 부러지는 소리.” 작가의 이 구절은, 어설픈 소설가의 휴머니티에 대한 세상의 조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혼돈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실’의 추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또한 그러한 삶의 자세가 치열하지 못할 때 야기되는 자조와 모멸감을, 작가 하창수는 ‘수선화’의 상징적 이미지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악의 꽃』으로 유명한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가 떠오른다. 
“이 날개달린 여행자는 얼마나 어색하고 무기력한지/ 전에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이/ 얼마나 추하고 우스꽝스러운지/ 어떤 이는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괴롭히고/ 어떤 이는 절뚝거리며 날았던 불구자를 흉내내는구나”(「알바트로스」)

저주받은 천재 시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거구의 바닷새 알바트로스. 시인의 고고한 이상도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한순간에 다 무너지고 만다.


하창수의 소설 속 ‘사내’는 마치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알바트로스’같은 캐릭터이다. 말하자면, 혼돈의 시기에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무거운 삶인가를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나르시스의 신화적 상상력을 캐릭터의 내면적 자의식에 밀도 있게 투사 시켜 소설미학을 완성해 나갔다. 즉, 수선화의 꽃말 이야기에서, 자기 모습에 취해 물에 빠져든 아름다운 소년의 ‘자살’은, 하창수의 「수선화를 꺾다」에서, 지식인의 자학과 좌절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포토
1/13
광고
광고
광고
인기기사 목록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문학/ 예술/인터뷰 많이 본 기사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