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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 (13)

허연 시인,「하얀 당신」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1/04/26 [21:22]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 (13)

허연 시인,「하얀 당신」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1/04/26 [21:22]

 

   © 포스트24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13), 허연 시인
                                                      「하얀 당신」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통과제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불가항력적인 죽음을 슬퍼하고 비통해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연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에서 시편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출몰한다. 다른 시인들과 달리 그의 죽음에는 죽은 자에 대한 ‘가여움’이 들어 있다. 이는 현세에서 고유한 존재로 살아가던 인간이 지하 세계에 묻힘으로써 성립하는 심리다. 산 자의 시선으로 본 죽음이란 이 세계를 버리고 초월적인 경계를 넘어버린 자에 대한 떠맡을 수 없는 마음이고, 제기하지 못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허연 시인은 죽은 자가 듣든 듣지 못하든 간에 질문을 하고 있다. 타자들이 어쩌다 죽었는지(「죽은 소나무」) 왜 시간의 타격을 방어하지 못하고 죽었는지, (「소년 記」, 「애인에게는 비밀로 말하겠지만」, 「하얀 당신」) 허연 시인의 죽음에 대한 ‘가여움’은 1960년대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에서의 무한 책임의 특징과 비슷하다. 하지만 구상의 시에서 무한 책임은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입은 적군(「적군의 묘지」)과 어린 병사(「어린 병사」)의 삶에 대한 불가능성을 시인이 자신의 책임으로 응답한다.


그에 비해 허연의 시는 일상적인 생활에 더 깊이 들어간다. 시인은 가난과 병고 때문에 죽은 자들에 대한 연대 너머의 어떤 ‘가여움’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가여움’은 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아픔이고, 불쌍함이며, 딱함이다. 이런 점으로 봐서 그의 시편들은 거시적인 죽음과 미시적인 죽음의 양상을 취한다고 볼 수 있는데, 거시적인 죽음은 ‘신’의 죽음과 ‘경원선’의 죽음처럼 전체가 분해되고 정신이 소화되지 않는 불내장성을 띤다. 미시적 죽음은 인간의 죽음 (「발인」, 「상수동」, 「이장」, 「소년 記」)과 비인격적인 죽음 ( 「무반주」 , 「시월」,  「빵가게가 있는 풍경」, 「해협」 )즉 새, 나비, 밀랍인형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시인의 내적 동요와 인격적 안정성을 뒤흔든다. 따라서 죽음은 시인에게 총론과 각론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죽음의 대상들은 힘의 논리에서 패한 피지배층 타자이다. 물질과 정신이 빈곤한 아픈 가족, 주변부 사람, 나비 등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에 드러내지 못한다. 지하 세계에 묻힌 이들은 주변부적 시각에 매몰될 수밖에 없어 세계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워진 존재가 된다. 시인은 이들을 호명하고 공감의 의미로 ‘가여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죄까지도 규명하려 든다.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强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
          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
          럼 서 있다 선명해지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
          아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
          꾸만 폭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
          얗기만 한지

 

          살아서 말해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
                  -「하얀 당신」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화자를 ‘검은색’으로, 너를 ‘흰색’으로 표현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완벽하게 규정짓고 있다. 1연에서 ‘검은색’의 상징은 산 자의 죄에 속하며, ‘흰색’의 상징은 죽은 혼령, 곧 너의 색이다. 따라서 각자의 세계를 지니고 있는 이들은 “함께 울 수” 없다. 하지만 “남녘 강설의 밤”에 죽은 자가 이 계에 나타남에 따라 시인 자신도 교차로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산 자에게 “비상등이 부정맥처럼 깜빡여” 죽음의 위험을 알리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강설의 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승에서의 친분을 갖춘 시인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은 “죽음 직전”과 “비상등”을 통해 죽음에 대한 동일성을 취하고 있다. 이외에도 3연 5행에서 시인은 “폭설”과 “혼령”을 ‘흰색’이라는 색채 비유를 통해 죽음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너와 내가 함께 살다가 너의 죽음을 보았을 때, 시인에게서 죽음이란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는” 일이고, 자신의 완성을 위해 일구어낸 시간의 업적을 도적질 당하는 일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산 자는 죽음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끌리게 된다고 한다. 과잉된 이끌림은 시인 자신이 죽음에 관한 유일성을 인식하는 일이고, 책임으로 서게 하는 일이며, 맡을 수 없는 책임을 떠안게 됨을 뜻한다. 결국 죽은 자를 향한 ‘가여움’은 지금까지 누리던 자신의 편안한 자리를 반납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해 시인은 제기하지 못할 질문을 한다. 너는 “폭설 내려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라는 물음은, 인간의 죽음과 비인격적 죽음이 외적 요인에 의해 구체성을 띠는 경험에서 온 것인지, 내적 동기에 기초해서 온 것인지, 죽음은 알 수 없는 세계, 즉 혼령의 세계이다. 시인은 혼령인 ‘너’를 호명해서 안타깝게 보고 있다. 여기에는 ‘검은’ 내가 스스로 죄 사함을 통해 ‘하얀’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닌, “재림한 자”를 통해 “종탑에 불을” 켜는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다. (「절창」) 따라서 죽은 자에 대한 ‘가여움’은 “다시 눈이 내리려면 20년이 걸린다”는 비유와 암시를 통해 20년 이후의 세계로 이동,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경원선 부고」, 「죽은 소나무」)


삶과 죽음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죽음은 교각의 그을린 맹세에 있고, 화단에 떨어진 자목련 속에 있으며, 물고기 형상을 한 채 무한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허연의 시는 죽음의 대상을 가난하거나 고통스럽게 하고, 때로 신마저도 죽게 한다. 그렇다고 시인이 굳은 틀 안에 박혀서 죽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건 아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객관성과 주관성에 의한 육체의 추출이므로 절대적인 비관성이 아니다. 허연 시에서 나타나는 죽음은 죽은 자에 대한 가여움이고, 떠맡을 수 없는 윤리적 책임으로서의 열망이다.
   
 
[허연 시인 약력]
서울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가 있다. 현대문학상과 시작작품상을 수상했다. 

 

 

 

 

   

    ▲권영옥 문학평론가

 

 [권영옥 약력: 시인, 문학평론가]
 □ 경북 안동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문학박사)
 □ 시론서 『한국현대시와 타자윤리 탐구』, 『구상 시의 타자윤리 연구』
 □ 시집 『청빛 환상』, 『계란에 그린 삽화』, 『모르는 영역』
 □ 전) 상지대, 아주대 외래교수

 □ 현재) 《두레문학》편집인, 문예비평지 『창』편집위원
 □ <두레문학상>수상

 □ 이메일 : dlagkwn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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