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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 」, 송주성 소설가의 단편소설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3/03/17 [20:32]

「추사체 」, 송주성 소설가의 단편소설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3/03/17 [20:32]

  ▲제주도.                                                                                                © 포스트24


                                              「추사체」 (단편소설) 

                                                                                                   

                                                                                                                송주성 소설가 

 

 구월 이일 한양을 출발해 딱 한 달 만인 시월 이일 화북포구에 도착했다. 금오랑이 앞장서 제주목관아로 향하고 뒤따르는 추사는 관덕정의 우아함에 뱃멀미를 털어냈다. 웅장한 이십팔 동 이백여섯 칸의 제주목관아가 작은 경복궁 같았다. 제주 목사는 중죄인으로 절도안치 유배형받고 온 그를 온화하게 대했다. 

 금오랑이 제주목관아에 보고하고 다시 길을 떠나 제주읍을 벗어나자 오른쪽으로 제주 바다가 보이고 왼편으로는 한라산이 높게 솟아있었다. 끝없는 소나무 숲 산길을 걸어 월산을 지나고 애월을 지났다. 말과 사람이 걷기도 힘든 울퉁불퉁한 돌길의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지천명을 한참 넘어 쉰다섯이 된 그는 한라산 산길을 걸으며 비로소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탐관오리를 탄핵한 윤상도의 옥사사건 십 년이 지나 헌종을 대리청정한 순원왕후은 1840년 운상도 옥사사건을 들추어 병조참판 김정희가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다는 죄명으로 곤장 서른여섯 대를 치고 그에게 절도안치, 한겨울의 서리 같은 유배형을 내렸다.

 금오랑은 한나절을 걸어 새별오름 언덕길 정상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했다. 검은 돌 위에 붉게 물든 단풍이 떨어져 바람에 날려갈 듯 살랑였다. 다리를 쭉 뻗고 나란히 앉아 내리막길을 바라봤다.

 금오랑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감, 이제 이 내리막길을 바다가 나올 때까지 걸으면 대정현입니다.

 -화북에서 몇 리 길인가?

 -화북포구에서 모슬포가 백 리 길이고 대정읍성까지는 구십 리입니다.

 한라산 중턱의 내리막 산길이 동광까지 또 십 리나 이어지며 솔향 그윽한 솔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곤장 맞은 엉덩이 살점이 다시 터져 피가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끝없는 산길을 걸어 귀양지 대정으로 가면서도 무사히 제주 바다를 건넌 것을 임금의 은혜로 여겼다.

 동광을 지나자 새로운 풍경이 그의 눈에 띄었다. 산에는 많은 묘가 있고 묘지는 검은 돌담으로 네모반듯하게 둘러싸여 묘하게 완당 김정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묘를 헤아리다가 너무 많아 포기했다. 어찌 묘가 무섭지 않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신기하고 담장을 쌓아 옹기종기 반듯반듯하였다.

 산 아래는 평지가 넓게 펼쳐지고 검은 돌담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졌다. 밭 전(田)자 같은 돌담 안에 밭이 있고 추수를 끝낸 곡물단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밭을 둘러싼 화산석 돌담은 그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완당은 제주 밭담에 정신을 빼앗겨 걷다 앞을 보니 거대한 박쥐를 닮은 절벽산 바굼지오름이 나타났다. 한양에[서 천오백여 리를 걸어 제주 남서쪽 끝 대정현에 도착했다. 

 금오랑이 그를 데리고 대정읍성으로 들어서자 제주 사람들이 나와 귀양살이 온 그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아이들은 흐르는 코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용케 살아 대정까지 왔다고 눈살을 찌푸리며 한양 사람을 구경했다. 금오랑은 포도청 포교 송계순의 집에 완당 김정희를 위리안치 하고 대정을 떠나며 큰절 올리고 눈물을 흘렸다. 완당은 급히 편지를 적어 한양의 가족들에게 보냈다.

 집 주변에는 손가락만한 가시가 돋친 탱자나무를 심고 완당은 대정 사람들과의 만남조차 통제되었다. 송포교 집은 햇빛이 드는 좋은 터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온돌방 한 칸에 발톱 같은 툇마루가 있고, 섬돌이 놓여 있고 동쪽에 부엌이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마당을 걸으면서도 그는 상심하지 않고 담장 밖으로 제주의 여러 가지 현무암 담을 살피는데 열중했다. 바람만 불면 무너질 듯 보기에 아슬아슬해 바람 많은 제주도에서 왜 위태로운 돌담을 쌓고 사는지 몹시 궁금했다. 처음에는 완당을 피하던 송포교도 차츰 그에게 다가와 거리낌 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완당은 귀양지에서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으나 송포교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생계를 의지했다. 조선시대 내내 대정에는 육십여 명의 유배자들이 들어왔다. 그 중 완당이 가장 덕망 높은 귀양자로 송포교도 완당을 존경하고 제주 사람들이 멀리서 아이들 공부를 맡기려고 대정읍성을 찾아왔다. 공부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생활도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였다. 

 그는 송포교에게 궁금했던 제주 돌담에 대하여 물었다.

 -제주 돌담은 몇 종류나 있는가?

 -대감님, 잘 들으셔야 이해합니다. 집에는 울담, 바다는 원담(갯담)을 쌓아 물고기를 잡고, 해안가는 환해장성을 쌓고, 말을 가두어 키우는 잣성은 잣담을 쌓고, 대정읍성처럼 성담도 쌓습니다. 그리고 해녀들이 물질 후 불을 쬐는 원형으로 쌓는 불턱이 있습니다. 제주도 돌담은 바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농부들이 밭을 일구다 나오는 한라산 폭발 당시의 검은 현무암을 골라 밭가에 담을 쌓기 시작한 것이 밭담의 시작입니다. 제주도에 말목장이 생기면서 말들이 밭담을 뛰어넘어 들어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자 밭담을 높이 쌓아 말들의 출입을 막으면서 자연스럽게 밭의 경계가 형성되고 또한 바람을 막아 밭작물을 보호하는 기능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현무암 돌을 골라내면서 제주도의 화산암 토양에서도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외담으로 쌓은 밭담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어 바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밭담 사이사이 심은 방풍림이 자라면서 제주도에서도 본격적으로 밭농사가 가능해졌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밭담을 흑룡만리라 부르며 그 길이가 만리장성 (6천4백Km)보다 훨씬 긴 오만오천리(2만2천KM)로 제주에서 한양을 스무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며 지구를 반 바퀴 돌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길이입니다.

 -송포교, 묘지에도 돌담을 쌓았던데 왜 그런가?

 -제주는 묘를 산이라 하고 묘에 쌓은 담을 산담이라 합니다. 산담은 세상을 떠난 자들의 집이며 제주민들의 마음씀씀이가 담긴 돌담입니다. 제주민들은 죽은 조상을 모시는 것도 매우 중하게 여겨 산(묘)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고인과 맞는 땅을 찾으면 오름이든, 숲이든, 밭이든 그 자리에 먼저 산을 쓰고 나중에 땅주인에게 허락을 받습니다. 제주민들은 산을 쓰는 중함을 서로 알고 있으므로 큰 다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산도 방목하는 말들이 들어와 훼손하므로 산의 사방을 돌담으로 막아 말의 출입을 막은 것이 산담입니다. 산담을 점점 크고 단단하게 쌓으면서 산담은 넓게 사각형으로 쌓게 되었습니다. 또한 산담은 꼭 영혼들이 드나드는 신문을 만드는데, 남자는 신문을 왼쪽에 여자는 신문을 오른쪽에 만듭니다. 

 -돌담을 쌓는 방식은 어떠한가?

 -막쌓기의 외담이 대표적입니다. 밭담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외담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다음은 맨 아랫부분을 여러 겹으로 쌓은 다음 외담으로 쌓는 것은 백켓담이라 부르고, 양옆을 두 줄로 쌓고 가운데는 잡석을 채우는 접담이 있고, 작은 돌을 아래 깔고 큰 돌을 위에 쌓는 잡굽담이 있습니다. 제주의 모든 돌담을 합하면 그 길이가 구만리(3만5천Km)나 되며 지구를 한 바퀴 돌 길이입니다.

 완당은 제주 돌담에 홀딱 빠졌다.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으나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유배인 신세였다. 그는 심신이 지쳐 온갖 풍토병에 시달리고 밥조차 먹기 힘들었다. 한양의 부인과 아들이 반찬을 만들어 보내고 집에 있는 책을 보내줘 완당은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 아이들 말고는 그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죄인을 가까이하다 큰 화라도 당할까봐 제주민들은 완당을 피했다.

 바람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불어왔다. 그 바람 때문에 대정에는 여자들이 남자보다 훨씬 많았다.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갔다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고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 한 달에 두어 번은 떼초상을 당해 대정읍성에서는 여인들의 곡소리가 파도치듯 밤새 들리곤 하였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제주민들은 거의 모두 첩을 두고 살며 아들을 낳으면 슬퍼하고 딸을 낳으면 기뻐했다. 

 육지와는 전혀 다른 풍습에 완당은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바람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민들은 한양의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제주목관아의 일을 보면 존경받았다. 완당은 송포교의 빠듯한 살림살이를 보고 밥을 얻어먹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맞은 제자 이시형이 읍성 밖 강도순의 집에 적거지를 마련해주고 거처를 옮길 것을 제의하여 제주도 입도 이 년 만에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는 대정현에서 최고 부자였으며 완당을 존경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이들도 모두 완당에게 공부를 배우도록 하였다. 완당의 생활이 나아지고 행동도 자유로워져 집밖으로 나가 대정현은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서 완당은 바굼지오름의 대정향교에 나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유배생활의 답답함을 털어버리고 오히려 활발하게 귀양살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강도순 가족은 안거리에 거주하고 완당은 모거리에서 생활하며 밖거리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강도순은 말연자방아가 있을 만큼 풍요로웠다. 완당은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 마음의 여우가 생기자 학문에 매달렸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썼다. 그리고 완당은 대정을 돌아다니며 돌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초가의 외벽 축담은 돌을 쌓고 흙으로 발라 검은 현무암과 황토의 조화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듯하였고, 초가지붕은 새끼줄로 그물처럼 엮어 바둑판을 보는 듯했다. 울담은 집 안팎의 경계를 삼고, 외부의 시선을 피해 얼기설기 쌓아 바람이 빠져나가도록 해 기세를 꺾는 동시에 울담을 보호하는 지혜로운 구조였다. 울담 안에는 안거리, 밖거리, 모거리가 자리해 가옥의 독립된 공간을 마련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올렛담은 곡선으로 쌓아 마을 입구로 불어오는 바람을 분산시켜 정낭까지 불어오는 동안 바람의 힘을 약화시켰다. 완당은 너무 부실해 보이는 울담을 손으로 밀어보았다. 하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이 태풍을 막아낸다니 눈으로 보기에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완당은 돌담을 보고 있노라면 글자를 보는 듯했다. 한자도 생각나고 한글도 보였다.

 완당은 들에 나가 높은 곳에서 밭담을 내려다보면 봄에는 유채꽃이 활짝 피어 샛노란 화선지에 검은 밭담들이 한글로 “봄이 왔소”라고 쓴 것 같고, 여름에는 푸른 나뭇잎에 가는 실줄기처럼 밭담이 뻗어 있는 듯하고, 가을에는 화문석를 펼친 듯 검은 밭담이 실처럼 왕골을 엮고 있고, 겨울에는 하얀 한지에 밭담이 흑룡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사시사철 밭 가운데는 네모 네모의 산담이 한라산의 창문처럼 열리고 닫히며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랬다. 완당은 돌담의 현무암 하나하나가 글자의 획을 이루어 검은 돌글로 쓴 책이 제주는 천만 권도 넘는 듯하였다. 자유분방한 돌담이 한라산을 거미줄처럼 힘차게 감아 돌았다.

 완당은 검은 돌담 위에 핀 수선화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대정은 수선화가 돌 틈마다 무더기로 피어 노란수선화는 생선알처럼 옹알옹알 피고, 하얀수선화는 은쟁반에 금잔처럼 피어나 제주 바다의 신선이 따로 없었다. 완당은 제주 농부들이 밭에서 뽑아버린 제주수선화를 한 무더기 주워다가 돌화분에 심어 책상 위에 두고 친구로 삼아, 시를 읽어주고 대화도 나누었다.

 

 제주수선화 줄기마다 금잔처럼 피었구나

 차가운 수선향 시린 선비의 문자향을 닮았네

 매화는 울담을 벗어나지 못하나

 한라산 천지에 핀 수선 제주의 신선일세

 

 완당은 수선화를 보며 시를 쓰고 고치길 수백 번이나 하였다. 제주수선화가 완당의 외로움과 부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친구로 꽃을 피울 때 한양 집을 정적들에게 빼앗기고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있던 가족이 보낸 편지 한 통이 바다를 건너왔다. 그는 부인에게 김치와 약재를 구해 보내달라고 보낸 편지의 답장으로 생각하고 기쁜 마음에 침을 발라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 펼쳐 읽었다. 

 그의 손이 떨리더니 비바람을 맞는 방풍림처럼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였다는 부고가 죽은 지 한 달 만에 왔다. 완당은 상복을 갖춰 입고 통곡하며 살아서 생이별하고 다시 부인이 먼저 죽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자 뼈에 사무치는 슬픔을 글로 적어 예산의 고인 영전에 편지를 보냈다.

 

 아아, 나는 산과 바다를 넘어 제주도 대정에 절도안치, 위리안치 되었으나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소. 하지만 부인의 죽음은 나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였소. 아아,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음을 맞이하거늘 나는 어이해 부인은 죽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 부인의 죽음으로 한없는 슬픔을 품게 되었으니 그 슬픔 무지개가 되고 우박이 될 것이요. 부인 잃은 슬픔 제주 귀양살이보다 심하고 제주도 바다보다 심하도다. 부인의 효와 덕을 사람들이 칭찬하여도 부인은 받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나는 부인이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낫다 하였거늘 부인이 그 약속을 어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제주 푸른 바다, 제주 파란 하늘에 슬픔만 한없이 사무치는구려.

 아아, 내가 하늘에 올라 신에게 부탁하여 다음 생에는 내가 부인의 아내로 태어나 먼저 죽는다면 부인이 이날의 이 슬픔을 알리오 마는, 내가 부인 사랑하는 마음 부인 아니면 그 누가 헤아리겠소.

 

 완당은 봇을 들고 시화에 몰두하고 서예에 전진해 슬픔을 털어내고자 하였다. 그는 벼루가 닳아 바닥이 구멍나도록 붓 수백 자루를 망가트렸다. 소치 허련이 제주도로 완당을 찾아왔다. 그는 진도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완당보다 열아홉 살이 어린 제자였다. 진도와 제주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허련은 초의선사가 그의 그림을 들고 한양으로 올라가 친구에게 보이고 완당은 그의 그림에 심취해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여 월성위궁(김정희 한양집)에서 거주하며 그림을 그리도록 한 애제자였다. 허련은 제주에 머물며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고 진도를 오가며 책과 반찬을 해 날랐다. 또한 해남 대둔사에 머물며 초의선사에게 시화를 배우고 선사가 만든 차를 제주의 김정희에게 전달했다. 완당은 술은 마시지 않았으나 차는 누구보다 즐겼으며 특히 초의선사가 만든 차를 최고로 생각했다. 허련이 올 때마다 제자보다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반겼으며 여러 번 허련을 통해 더 많은 차를 보내달라고 타박도 하였다. 친구가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절친한 투정이었다. 

 완당은 부인이 죽고 책을 받아보기 어려웠는데 하루는 귀한 책 백이십여 권을 선물로 받았다. 중국을 다녀온 우선 이상적은 완당보다 열여덟 살이 어린 제자로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시화와 금석문을 익힌 역관이었다. 

 그는 귀한 책을 받고 죽은 부인이 살아 돌아온 듯 좋아했다. 완당은 차를 보내는 초의선사의 우정과. 소치 허련, 우선 이상적과 깊은 사제의 정을 생각하며 그림 한 폭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완당은 한지를 길게 펼치고 붓을 들어 오른쪽 끝에 ‘세한도’ 라고 재목을 적었다. 그리고 우선시상(우선에게 선물하다)이라고 쓰고 ‘완당’ 관서를 적고 ‘정희’ ‘완당’ 도인을 찍었다. 

 그는 붓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넓게 펼쳐진 대정의 밭을 바라보았다. 검은 밭담이 길게 바다에서 하늘까지 닿아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완당이 다시 붓을 들고 먹을 묻혀 붓을 서너 번 벼루바닥에 돌리더니 한지에 무심하게 돌담의 현무암 같은 작은 원을 둥글둥글 그려 쌓았다. 온 정성을 다해 그리던 완당이 구불구불 구부러진 가지에 솔잎 대여섯 송이를 듬성듬성 그리고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뿌리가 드러난 고목에 작은 원을 그려 쌓아 소나무 껍질이 현무암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밑동이 뻥 뚫려 죽은 소나무 가지는 끝이 오랜 바람을 탄 듯 휘어지게 그리고, 또 다른 가지는 제주 밭담처럼 자유분방에게 휘어트려 솔향이 바람에 날리듯 표현하고, 솔잎 몇 개 그려 소나무 고목이 살아 숨 쉬게 하였다.

 그는 붓을 내려놓고 수선화에게 물었다.

 -어때? 

 -......

 -차향이 솔솔 피어오르는 것 같지?

 -......

 -차 한 잔 마시고 그려도 되겠지...

 그는 일어나 차 한 잔을 끓여들고 대정의 들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향이 그윽하게 초의의 우정을 피어 올렸다. 입 안 가득 쌉쌀한 차 맛이 머물렀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앉으며 완당이 수선화를 보고 말했다.

 -늙어가는 나를 그렸으니 이제 친구 초의선사를 그려볼까?

 -.....

 -평생 참 좋은 친구지 동방에서 최고의 다도를 지닌 친구고...

 완당은 소나무 고목에 바짝 붙여 굵고 검게 밑둥에 짙은 먹칠을 하고 축담을 그리듯 소나무를 감싸는 짧은 가지 세를 그리고 그 위에는 울담처럼 조금 가는 가지를 그리고. 꼭대기는 올렛담처럼 곡선으로 휘어 그렸다. 

 완당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소나무를 바라보며, 붓을 놓고 수선화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어때 초의선사가 마음에 드나?

 -.....

 -꼭대기 가지가 이상하다고?

 -.....

 -초의선사도 이제 늙어서 더 자라지는 못할 거야 가지도 휘어지고 부러질 날만 남았지...

 완당은 다시 차 한 잔을 끓였다. 그는 강도순 집의 모거리에 앉아 밖거리를 바라보았다. 제주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집, 완당이 시화를 쓰고 서예를 하는 집, 제주의 일자집은 궁궐처럼 복잡하지 않고 목숨을 거는 권력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집이었다. 다시 붓을 든 완당은 열한 번 직선을 그어 제주 일자집 한 채를 뚝딱 그렸다. 그리고 망설이다 둥글게 창문 하나를 그렸다. 

 그는 붓을 놓고 피식 웃으며 수선화에게 물었다.

 -어때 제주도 집하고 똑같지?

 -......

 -왜 창문이 둥그냐고?

 -완당의 집이니까. 완당의 ‘집 당’ (堂)자에는 가운데 입구 자가 창문처럼 있잖아. 그럼 왜 창문을 네모로 안 그렸냐고? 원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모양이며 모든 세상사는 원점으로 돌아가니까.

 완당은 다시 차를 끓여 마시며 한라산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정말 차를 사랑하는 선비답게 쉬지 않고 차를 마셨다. 초의선사는 그가 왜 차를 안 보내냐고 편지로 재촉을 하면 완당의 마음을 헤아려 서둘러 차를 만들어 직접 배를 타고 제주도로 찾아오곤 하였다. 

 완당은 차를 마시고 아쉬운 듯 찻잔의 바닥을 들여다봤다. 그는 한 잔을 더 마실까 망설이다 다시 붓에 먹을 바르고 집 옆에 소나무보다 가는 나무 밑동을 그리고 밭담 같은 가지 셋을 그려 잣나무 한그루를 그렸다. 그리고 잣나무 뒤에 나무 하나를 조금 더 높게 그린 다음 좌우로 나란히 가지 여섯을 그리고 꼭대기에는 잣송이 셋을 그렸다. 그는 나무 아래 좌우로 쓱쓱 붓질을 해 언덕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소나무 뒤에 집 마당을 가볍게 붓질해 완성했다. 

 그는 붓을 내려놓고 수선화를 바라보았다.

 -다 그렸는데 어때?

 -......

 -앞에 있는 잣나무는 소치야 그는 늘 내 곁에 있잖아 그래서 집 가깝게 그렸어. 그럼 뒤에 서 있는 잣나무는 누군지 알겠지? 이 그림의 주인공 우선 이상적이겠지. 소치와 우선은 아직 젊고 앞으로 쭉쭉 커나갈 인재들이니 푸르고 생생하게 그렸다.

 -어때 그리다 만 것 같아?

 -.....

 -아니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아. 한양에서는 몰랐는데 제주도에 와서 살아보니까 깨닫게 되더라. 햇빛이 책상까지 잘 드는 집 한 채, 차를 끓이는 대나무 화로, 문방사우 있으면 부족할 것이 없더라. 완당은 서각 솜씨를 발휘해 장무상망(오래토록 서로 잊지 말자)을 새겨 세한도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찍었다. 그리고 그는 차 한 잔을 마시고 세한도의 발문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이 ‘만학집’ 여덟 권과 ‘대운산방문고’ 육 권 이 책을 보내고 또 하장령의 ‘황청경세문표’ 백이십 권을 보내왔으니 이 책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고 세상 끝에서나 얻을 수 있는 책이므로 그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지금 세상은 모두 권력과 세력을 좇아가는데 중국에서 구한 귀한 책을 제주 끝 대정에 유배와 있는 노인에게 보내다니 그대의 마음이 맑고 순수하기 그지없어라. 엣 선인들은 “눈 내리는 한겨울이 되어야 소나무, 잣나무의 사계절 변함없는 푸르름을 안다고” 하였다. 우선이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잘하고 못한 것이 없었으나 모든 권세를 잃은 나에게 책을 보낸 마음을 생각하면 우선이야 말로 진정한 제자가 아니겠는가? 성인이 추운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칭찬하는 것은 시들지 않는 나무의 강인함만 일컫는 것이 아니며 세한에도 변함없는 사람의 절개를 말하는 것이니 나에게 우선은 소나무, 잣나무와 다르지 않네. 한양에서는 나의 권세에 기대 이익을 좇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제주로 귀양을 온 다음에는 초의선사, 소치. 우선 말고는 나를 찾는 사람이 없으니 인심의 박절함이 슬프도다.

 

완당 노인이 쓰다

 

 완당은 발문을 쓰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아침 찻잎에 맺힌 이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제주 바다가 바람으로 눈물을 닦고 한라산 솔바람이 눈물을 훔쳤다. 완당은 눈물을 멈추고 수선화를 바라보았다.

 -눈물만 흘리고 있으면 바보겠지?

 -.....

 -이제 이 귀양살이를 즐겨보자. 학문을 익히고 독서하는 일보다 큰일은 없으니 나는 제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서예를 완성하고자 한다.

 완당은 바굼지오름에 있는 대정향교로 부지런히 나가 독서하고 제주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며 집에서는 서예를 다듬는데 최선을 다했다. 완당은 한라산이 시원하게 보이는 날 제주 제자 이시형을 불러 산방산 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그는 즉시 박혜백, 강도순를 부르고 완당은 제주도 제자들과 산방산 탐방에 나섰다. 유배 온 완당이 처음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위리안치 중이지만 대정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제주도 제자들 덕이었다. 잡다한 일은 모두 이시형이 처리했다. 이시형은 산방산을 앞서 오르며 완당을 안내하였다. 산방산에서 바라보는 제주 바다와 한라산 그리고 제주 밭담들이 한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완당은 자꾸 밭담에 머무는 눈길을 감추지 않았다. 강도순이 망태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대나무화로와 차를 꺼내 물을 끓이고 완당에게 차 한 잔 권하였다. 

 -스승님, 차 한 잔 하십시오.

 -여기까지 화로를 지고 왔는가?

 -스승님은 술은 안 드시고 차를 드시니 따뜻한 차 한 잔은 대접해야지요.

 완당은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차를 두 잔이나 마셨다. 하지만 그들은 차 대신 술을 마셨다. 완당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술이 좋은가?

 박혜백이 미소 지으며 다시 물었다.

 -스승님은 왜 그리 차가 좋으십니까?

 -글쎄, 어찌 말로 차 맛을 표현할 수 있겠나?

 그때 헐레벌떡 산방산을 뛰어올라오는 이가 있었다. 완당이 그를 보고 말했다.

 -수선화 아닌가?

 -오진사 맞습니다.

 완당이 오진사를 반기자 다른 친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완당은 오진사를 수선화처럼 아름다운 선비라고 자주 칭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제자들은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오진사도 술자리에 합석했다.

 완당이 이시형을 보고 물었다.

 -이시형은 내가 무섭지 않았던가? 유배 온 중죄인을 가까이 하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는데.

 -저는 스승님을 처음 뵙는 순간 큰선비가 대정에 왔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나는 유배를 왔는데 자네는 기뻤단 말인가?

 -스승님은 슬픈 일이나 우리 대정 사람들과 제주 사람들에게는 큰스승님을 만날 기회를 나라님이 주신 거지요. 이 험하고 척박한 제주 땅에서 큰스승에게 학문 배울 기회는 조선 내내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잘 만난 영광이거늘 어찌 목숨이 아깝겠습니까? 스승님을 못 만났다면 평생 한낮 제주섬에서 타고난 삶을 살다 죽을 것인데...

 완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도순은 나에게 적거지를 제공하며 두렵지 않았는가? 

 -스승님에게 글을 배운 우리 아이들이 제주의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한라산은 삼배육십여 개의 오름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름에서 글을 배워 한라산보다 학문이 높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한라산이란 말인가?

 -스승님은 척박한 제주에 학문의 상아탑을 쌓을 대학자이십니다. 제주민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완당이 웃으며 오진사에게 차 한 잔을 더 청해 바다 위에 떠 있는 가파도와 마라도를 바라보고 차를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제자들도 술로 목을 축이며 장난을 쳤다. 

 완당이 다시 질문했다.

 -박혜백은 붓을 얼마나 알고 있나? 아는 대로 한번 얘기해 보게.

 -청필 청설모붓, 서수필 쥐수염붓, 초모필 담비붓, 장호 노루붓, 저모필 돼지붓, 양호필 양붓, 황모필 족제비붓, 갈필 칡붓, 계호필 닭붓 산마필 말붓, 묘필 고양아붓, 토모필 산토끼붓 등을 알고 있습니다.

 -박혜백은 제주를 벗어나 본 적이 있는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필장으로 좋은 재주를 가졌으나 세상을 돌아보지 않아 그 견문이 솜씨에 못 미쳐 안타까울 따름이네, 내가 한양의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세상의 좋은 붓을 모아 보내달라고 청해보겠네. 

 -스승님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좋은 붓에서 일필휘지의 명필이 나오는 법이네.

 -붓은 몇 개나 만들었는가?

 -수백 자루는 될 겁니다. 

 -앞으로 나는 수천 자루의 붓이 필요할 걸세.

 -스승님이 쓰신다면 수만 자루도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인장은 몇 개나 새겼는가?

 -아직 스승님 솜씨를 따를 수는 없지만 백여 개는 새겼습니다.

 친구들 눈치를 보며 술을 마시는 오진사를 보고 완당이 미소를 지었다.

 -오진사, 독서는 쉬지 않고 계속하는가?

 -스승님이 주신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오진사 글을 쓰고 독서만 하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에 이바지해야 학문으로 값어치가 있는 것이지...

 강도순이 끼어들었다.

 -스승님, 오진사는 훈장이 제격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일보다 큰일은 없네.

 -스승님, 제주도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완당이 대나무 화로에서 식지 않은 차 한 잔을 더 따라 마시며 말했다.

 -나는 제주도에서 나만의 글씨를 완성해볼까 하네. 자네들이 많이 도움을 주게나.

 -스승님, 저 강도순이 벼루와 먹, 한지는 얼마든지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스승님, 저 오진사만큼 대정을 구석구석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이시형이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먼저 산방산을 내려갔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완당도 곧잘 산을 탔다. 산방산을 내려오자 이시형이 앞서 용머리해안으로 안내하며 마침 썰물이라 해안 절벽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완당은 용머리해안으로 내려서는 순간 숨이 딱 막혔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바람과 파도가 만든 절벽 해안선을 절경으로 숨기고 있었다. 완당은 자연의 위대한 예술품을 보고 감탄했다. 인간은 마음의 한계로 절대 만들 수 없는 걸작을 자연의 신이 만든 자유로운 절벽의 아름다움에 무릎을 꿇었다. 

 완당이 평생을 믿어왔던 “글쓰기는 왕희지에서 구양순을 통하여 들어온다.”는 철칙이 대정 산방산 용머리해안에서 제주 바다의 바람과 파도에 깨지는 순간이었다. 완당은 다음 날부터 새벽 같이 일어나 오진사를 앞세우고 대정의 바다와 오름 그리고 밭을 돌아다니며 돌담의 형태를 자세히 연구했다. 검은 돌을 쌓아 이어지는 돌담은 제주의 핏줄과 같았다. 직선과 곡선이 자유롭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가공하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 든든하게 쌓은 제주민들의 지혜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밭담의 바람구멍은 완당의 발길을 수천 번 잡았다.

 -오진사, 제주 돌담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스승님, 땅에 구르는 볼품없는 검은 현무암을 제주민들이 하나하나 손수 쌓아 올린 탓에 어떤 방식의 구속도 받지 않아 돌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이 경이롭다 하겠습니다.

-굴러다니며 깨지고 닳은 뭉툭뭉툭한 현무암이 돌담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검은 선이 만나고 갈라지며 제주 땅에 추상적인 글을 썼다는 것 아닌가?

 -제주 돌담은 바람이 쌓고 바람이 허물고 다시 바람이 수백 년을 쌓아 만든 예술품입니다.

 -맞네, 바람의 작품이지 이리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네. 

 -스승님,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습니까?

 -오진사, 제주 돌담으로 한라산의 맑은 정기와 자유로운 품성과 인격을 지닌 나만의 추사체를 완성해 볼 생각이네.

 -스승님, 구양순 필법에 위하면 점은 산에서 별이 떨어지듯, 가로획은 천리를 달리는 구름처럼, 세로는 오래된 나무처럼, 꺾는 획은 활을 당기듯 쓰라 되어있습니다. 어느 누가 그의 필법을 따르면 구양순보다 잘 쓸 수 있겠습니다.

 -구양순은 서예의 성인 왕휘지 필법을 모사하다 자기만의 서체를 완성하여 해서가 으뜸이었네. 그의 서체 ‘구체’는 힘이 넘치고 웅장하지만 엄격한 규정을 따랐네. 왕휘지는 서성으로 불릴 만큼 글씨를 잘 썼으며 어려서는 여류명필에게 글씨를 배우고 후에는 스승을 두지 않고 금석문을 바탕으로 스스로 글씨를 연구하였다네. 왕휘지는 해서, 행서, 초서의 서체를 완성하였고, 서예를 예술로 승화하여 힘차고 귀족 기품의 ‘왕휘지체’ 라는 서풍을 완성하였네. 하지만 서예가들이 왕휘지, 구양순의 필체만 따르다보니 그들을 능가하는 서예가가 천오백여 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네.

 -스승님,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독특한 새로운 서체가 나올 때도 되었습니다.

 -오진사, 이제 새로운 서체가 나올 만도 하지. 그것도 우리 조선에서 말일세.

 완당은 돌담을 돌아보면 볼수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분명 돌담에서 새로운 서체가 보이지만 쉽게 머리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완당은 달밤에 대정을 돌아다니며 밭담, 산담, 울담, 울렛담을 살폈다. 그는 달빛에 비추는 밭 한가운데 네모난 산담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었다. 네모반듯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두 손으로 머리를 치며 밤새 산담을 돌고 돌며 필체의 영감을 얻으려고 감성을 자극했다.

 김정희는 십육 세가 되는 해에 봄이 오자 ‘입춘대길’을 써 대문에 붙였다. 그 글씨를 본 아버지가 악필에 크게 놀라 박제가에게 데려가 문하생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박제가가 사망할 때까지 오 년을 시화와 서예를 익혔다. 김정희는 원춘(봄의 첫날)이란 호가 있었으나 그 사건 이후로 쓰지 않았다. 박제가는 추사를 호로 김정희에게 붙여주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추사(가을의 역사)라는 새로운 호를 얻고 매우 기뻐하였다. 추사는 이십사 세에 아버지를 수행해 청나라로 가 옹방강, 완원을 만나 금석학에 심취하여 옹방강의 서체를 배워 청나라에도 이름을 날렸다. 추사는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가 완원을 찾아가 사제의 도의를 청하였다. 완원은 스물두 살이나 어린 추사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을 알아보고 고증학과 금석학의 학문을 전해주었다. 추사는 스승 완원의 학식을 존경하여 그의 ‘완’자을 따 완당이라 아호를 정했다. 완원도 추사의 마음을 헤아리고 완당이란 호를 사제의 인증으로 인정해주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완당이란 호를 사용하며 학문과 글쓰기에 전념하고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고 문과에 급제해 병조참판까지 올랐으나 쉰다섯 되던 해에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 

 완당은 산담을 돌며 살아온 날들이 제주 바람처럼 지나갔다. 지나간 세월은 빡빡한 인생의 틀에 갇혀 삶의 의미를 살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최고의 모임은 아내와 아들딸, 손주와 가족들이 모이는 것이고 가장 푸짐한 상차림은 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이면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완당은 날이 밝아서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꿈에 제주의 돌담들이 흑룡으로 변해 날아다니며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완당은 생전 처음 보는 서체에 흑룡을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리다 잠에서 깼다. 머릿속에 생생하게 글씨들이 새겨져 수십만 자의 한자와 한글이 우주의 별처럼 뇌 속을 떠돌았다.

 완당은 즉시 일어나 한지를 펼치고 먹을 짙게 갈아 걸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현무암덩어리 문진을 한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뇌 속을 행성처럼 날아다니는 글자를 한자씩 종이에 썼다. 그는 항상 떠오르는 산담의 네모를 글자가 벗어나지 않도록 획의 삐침과 흘림을 쓰지 않았다. 글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산담에 가두어 글자가 네모나게 썼다. 

 또한 모든 가로획은 밭담처럼 죽 뻗어나가듯 긋고, 세로획은 축담을 쌓듯 그어 내리고, 좌우로 삐침은 울담을 쌓듯 살짝 삐치다 멈추고, 입구획은 산담을 그리듯 네모를 써놓았다. 다만 모든 획은 일직선으로 긋지 않고 돌담의 현무암을 자연스럽게 쌓아올리듯 획이 울퉁불퉁하게 그었다. 제주 돌담의 자연미를 획의 흐름으로 그려내려고 하였다. 

 완당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서체를 시용하여 법첩과 비첩을 혼융하여 자유롭게 쓰고 싶은 대로 썼다. 한참 서예에 몰두하다 보면 한지에 먹물이 검게 흠뻑 젖어들었다. 완당은 벼루 바닥이 뚫린 것도 모르고 글쓰기에 빠져들곤 하였다. 어느 때는 한지가 “부욱!” 찢어져 붓을 살피면 대나무만 남아 있기도 하였다. 그렇게 구멍 난 벼루가 수십 개나 되고 부러진 붓이 수천 개나 되었다. 완당의 방에는 구겨 버린 한지가 천장까지 닿아있었다.

 제자 이시형이 수시로 드나들며 완당이 쓰러져 잠든 사이에 방을 치우고 책상을 치웠다. 완당이 하루는 몹시 발목이 쓰라려 발을 들고 복숭아뼈를 보니 살이 헐어 피가 흘러나왔다. 엉덩이는 따갑고 팔목은 시리고 절였다. 그러나 완당은 붓을 놓지 않고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글자를 쓰고 쓰고 또 썼다. 차츰 누구에게도 글을 보이지 않아 마음이 편해지고 잘 쓰겠다는 절박함이 없어 마음이 가벼웠다. 무뚝뚝한 돌담을 쌓듯 복숭아뼈에 새 딱지가 생기고 떨어지길 수십 번 하도록 글을 썼다.

 

 하루는 대정향교 훈장이 완당에게 향교의 현판을 부탁했다. 그는 의문당이란 향교에 딱 맞는 액자를 써주었다. 그런데 현판이 걸리자 제자들이 신통해 하지 않았다.

 이기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스승님, 글씨가 지나치게 평범해 보입니다.

 -대정향교는 공부를 하는 곳이라 해서로 썼느니라.

 박혜백이 물었다.

 -전혀 스승님 글씨 같지 않습니다.

 -학문의 흐트러짐이 없기를 바라며 쓴 현판이다.

 완당은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당혹스러웠다. 무엇보다 평범하다는 제자들의 말은 그의 마음 깊이 파고들어 서운하고 부끄럽게 하였다. 완당은 혼자 현판을 유심히 바라보고 스스로 놀랐다. 추사의 글씨라는 특징은 전혀 없었다.

 어느 날 추사는 김만덕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거상으로 제주도에 기근이 들자 거금을 내놓아 제주 사람들을 구흘한 연인이었다. 정조 왕이 그녀를 만나 ‘행수내의녀’ 감투를 내리고 영의정 체제공이 만덕전을 쓰고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이별의 시 네 수를 써준 여장부였다. 추사는 만덕의 손자에게 ‘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비추다)를 예서체로 써주었다. 

 제자들은 은광연세를 보고 흡족해 하였다.

 강도순이 물었다.

 -스승님의 추사 문자향이 나고 글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하하 정말 그런가?

 오진사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 (恩)을 두텁게 쓴 연유가 있습니까?

 -누구든 은혜를 입으면 마음 깊이 무겁게 여기라는 뜻을 담았느니라.

 -스승님의 글은 서화의 구별이 없는 듯하여 추사의 기상이 넘칩니다.

 추사는 제자들 칭찬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매우 기뻤다. 그는 어떤 글자를 써야하는지 깨달았다. 제자들은 해학미와 슬기로운 미학의 독특한 글자를 원했다. 추사는 대정의 돌담을 검은 현무암 하나까지 살피며 추사체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박혜백이 붓 백여 자루를 들고 와 물었다.

 -스승님, 지금까지 천여 개를 가져다드렸는데 붓은 남아 있습니까?

 -다 부러지고 두어 자루 남아 기별을 할까했네.

 강도순이 박혜백을 보고 안거리에서 밖거리로 건너와 물었다.

 -스승님, 벼루와 먹 그리고 한지는 충분히 남아있지요?

 -벼루도 수십 개나 구멍이 나고 먹은 헤아릴 수도 없이 썼네. 한지는 수만 장은 쓴 듯하네.

 -스승님 문방사우는 걱정 마시고 추사체 완성만 생각 하십시오.

 -이시형이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오진사가 먹을 갈아주니 제자들의 고마움이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네.

 추사는 뇌 속을 날아다니는 글자가 잊히기 전에 추사체로 써내려고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추사는 글을 쓰고 오진사는 먹을 쉬지 않고 갈았다.

 오진사가 물었다.

 -스승님, 먹은 왜 진득하게 갈아야 합니까?

 -먹은 짙게 갈아 붓에 먹을 묻히면 좁쌀이 알알이 맺힌 듯해야 한지에 글을 쓰면 먹이 퍼지지 않고 글의 선이 깔끔하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붓을 잡는 법은 어떠합니까?

 -어깨에 힘을 빼고 손목과 붓을 잡는 손가락의 힘도 완전히 빼 붓이 가볍게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이시형이 새로운 한지를 펼치고 물었다.

 -스승님은 간찰체를 따르십니까?

 -중국은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간찰(필법)을 따르지 않는데 우리 조선 사람들은 필법이란 나쁜 버릇에 빠져있다. 나는 필법을 배운 적도 없고 필법에 어떤 체식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한다.

 -추사체의 필법은 정해져 있습니까?

 -나는 너희들까지 왜 필법에 얽매이려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스승님, 글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인데 잘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누구에게 보여야 한다는 부끄러움과 잘 써야한다는 압박감이 글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다. 못난 선비들이 만들어놓은 필법에 얽매여 자신의 글씨를 스스로 망치는 것이다. 최고의 필체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필체를 갖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마음으로 쓰라는 말입니까?

 -잘 쓰고 못 쓰고를 굳이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추사는 추사체를 다듬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문자는 향기가 나고 사람은 학문의 기운이 배인 인품의 향기 풍기고, 학문과 예술이 일치하듯 그림과 글씨가 일치하고, 옛글을 모범으로 새로운 글씨를 창안하고, 글씨에서 나오는 강한 기상과 특이한 점과 획에서 나오는 소박함, 기이함 속에 담긴 아이 같은 천진함, 사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이 글씨에 담겨야 추사체라고 생각했다.

 추사는 문밖을 바라보다 강도순의 식솔들이 물허벅을 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낑낑거리며 물을 길어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붓을 놓고 강도순의 식솔들에게 물었다.

 -무슨 물을 그리 자주 길어오는고?

 -나으리의 먹물과 찻물을 길어오는 것입니다.

 추사는 처음으로 제주는 물이 귀하고 강도순의 집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양을 온 지도 칠여 년이나 지났다. 추사는 강도순의 식솔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방안에 쌓인 버려진 문방사우를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어 이시형에게 물었다.

 -육지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은 누구였는가?

 -초의선사가 차를 가지고 네 번 찾아왔고, 이상적이 책을 가지고 세 번 찾아왔고, 소치 허련은 온갖 반찬거리를 들고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다녀갔습니다.

 -그럼 내가 추사체를 연구하며 마신 차는 얼마나 되는가?

 -초의선사가 해마다 한 항아리씩 차를 보내왔는데 벌써 여덟 항아리의 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찻물만 수천 항아리를 마셨을 겁니다. 또한 먹물로 쓴 물이 천여 항아리는 될 듯합니다.

 -이런 세상에 나만을 생각했구나. 도움 준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추사는 이시형에게 물이 풍부한 집으로 적거지를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책상 위의 재주수선화를 보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시형은 청천리에 새로운 추사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으로 옮겼다. 새로운 적거지에서 제주 물맛에 반한 추사는 차를 끓여놓고 제자들 앞에서 처음으로 갈고닦은 완성된 추사체를 써보였다. 추사는 ‘작은 창에 밝은 빛이 비추니 나를 책상 앞에 앉아있게 하네.’ ‘小窓多明使我久坐’(소창다명사아구좌)를 썼다. 제자들은 파격적으로 개성 넘치는 추사체를 보고 감탄하였다. 

 강도순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질문했다.

 -스승님 창문 ‘창’ 자를 쓰지 않고 정말로 창문을 그려 넣었습니다.

 -서화는 원래 한 뿌리이거늘 그림과 글씨를 조화롭게 배치하면 예술작품이 아니겠는가!

 오진사가 궁금한 듯 물었다.

 -다명은 어찌 획이 거꾸로 삐쳤습니까?

 -마음 가는 대로 돌 구르듯 썼네.

 -스승님 하나 더 묻겠습니다.

 -마지막 “앉을 좌” (坐)는 흙토 위에 사람인이 아닌 입구를 쓴 까닭은 무엇입니까?

 -저기 밖을 보게 밭에 네모난 산담이 둘 있지 않는가.

 제자들은 밭가운데 자리한 네모난 산담 두 개를 보고 스승의 슬기에 감탄했다. 박혜백이 완성된 추사체를 하나만 더 써 보여 달라고 스승을 졸랐다. 추사는 차 한 잔을 청하고 이시형이 차를 우려 가져왔다. 일어나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대정의 산과 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고 앉아 일필휘지로 바람처럼 추사체를 써내려갔다. 

谿山無盡(계산무진) ‘계곡과 산은 끝이 없네.’ 추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라산은 높고 계곡은 깊고 제주 바다는 그 끝이 안보여 써보았네. 나는 언제나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박혜백이 물었다.

 -‘계’ 자는 무슨 의미가 담겼습니까? 

 -‘시내 계’ 아닌가 바닷가 시내 옆에는 해녀들의 불턱 돌담이 있지 않는가.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불턱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양이네. 한글 ‘옷’(추사의 계산무진 서화 작품 속)자를 찾았는가?

 -......

 -스승님, 그럼 ‘뫼 산‘은 무슨 의미입니까?

 -산담은 죽은 자들의 집 아닌가? 산담 안에 영혼이 누워있는 모양 일세.

 박혜백이 이시형을 밀치고 나오며 질문했다.

 -스승님, ‘없을 무’ 자는 밭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밭담의 현무암 가운데 구멍이 송송 뚫린 것 같습니다.

 -그래 바로 보았다.

 -스승님, 그럼 ‘다될 진’은 든든하게 겹담으로 성담을 쌓고 화살 구멍을 뚫어 놓은 것입니까?

 -밑은 잡굽담으로 두텁게 쌓고 성담을 겹담으로 쌓아 올리고 화살 쏘는 구멍을 만든 모양이네.

 -스승님, 그러면 왜 무진을 쌓아 쓰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진’은 제주도이고 ‘무’는 한라산이네. 한라산 백록담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스승님, 추사체는 제주의 돌담을 보고 썼다는 말입니까?

 -그러네, 나는 제주의 돌담에서 영감을 얻어 추사체를 완성하였네.

 제자들은 스승의 제주돌담처럼 무디고 아이들 장난기 끼도 섞인 듯하면서도 세심히 전체를 바라보면 안정적인 구조를 가진 뜻과 의미가 깊은 추사체의 예술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에게 진심으로 존경 어린 큰절을 올렸다. 추사는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고 추사체는 제주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하였다. 

 추사는 일 년여 후 해배가 되었다. 오진사는 서귀포에 서당을 열었고 강도순은 제주의 거부가 되었다. 추사는 팔 년 삼 개월의 유배를 마치고 1848년 겨울 다시 화북포구에 섰다. 추사 김정희에게 글공부를 배운 수백 명의 제주섬 아이들과 선비들이 그를 배웅하였다. 추사 옆은 이시형과 박혜백이 그를 따라 한양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끝-

 

 

 ▲ 송주성 소설가.                                          © 포스트24



【송주성 소설가 약력】

 

□2014년 제1회 금샘문학상 대상 작품활동 시작

□2018년 제6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2019년 제1회 무예소설문학상 최우수상

 

【저서】

2018 장편소설 <직지 대모>

□2021 장편소설 <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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