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8회 푸른시학상,' 조창희 시인을 만나다

수상작품 계단주의 외 4편

연명지 기자 | 기사입력 2022/01/09 [19:11]

'2021년 제18회 푸른시학상,' 조창희 시인을 만나다

수상작품 계단주의 외 4편

연명지 기자 | 입력 : 2022/01/09 [19:11]

 

'2021년 제18회 푸른시학상' 조창희 시인의 수상작품 “계단주의” 외 4편과 수상소감을 소개합니다.  

 

          계단 주의 

 

     한 아이가 

     계단 위에 있는 나비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아이는 계단을 손에 쥘 때까지 계단을 오른다

     키가 자랄수록 

     더 높은 계단                                     

     햇빛 속에 계단을 펼친다  

 

     청년이 된 아이가 한 걸음씩 계단을 옮겨오른다

     계단이 옮겨간다

 

     청년은 계단을 주의注意를 하다 말고 주의主義에 빠진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목이 삐걱거리고

     계단으로부터

     깨어나지 못하는 발

 

     창문 열어 계단주의階段主義를 환기한다

     창문 닫고 계단階段 주의注意를 확인한다

 

     날이 어두워도 계단은 번들거린다

 

     위태로운 나비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투명한 유리날개나비가

     계단 끝에서 날개를 폈다 접고 폈다 접었다 하고 있다

 

     어른이 된 아이가 

     젖은 계단 끝에 있는 나비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인형약국

 

인형약국에 갔다 그녀가 처방전을 받으면서 보던 TV를 계속 본다 TV 속에도 길이 있나요 묻는 내게 안 가본 길은 수업 중인 인형 같고 안 해본 일은 몽상하는 돌 같아요 혼잣말처럼 말하고 약봉지를 건네고 식사 후 30분에 약을 먹으라고 말하면서 TV를 보고 약값을 잊어버리고 약값이 얼마예요 묻는데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바뀐 화면에서 호피족 인디언들이 춤을 추고 있기 때문인데 그들은 카치나 복장과 가면을 쓰고 카치나 인형을 흔들며 옥수수 댄스를 추고 사슴 댄스를 추다가 버펄로 댄스를 춘다 파란 옥수수는 파랗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머릿속이 먼 곳을 떠올리는 것일까

 

그녀가 창문을 연다 그녀는 약국을 벗어나 양떼구름을 향해 비행한다 하늘이 찢기는 굉음에 놀란 양 떼가 흩어지는 사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모래 산맥을 따라 비행을 마치고 과테말라에서 걱정 인형을 사고 약국의 걱정을 인형에게 주고 나미브 사막의 데드 블레이를 걷는다 붉은 사막의 모래가 햇빛 받아 제각각의 색깔로 빛나는데 죽은 나무가 사막의 유령처럼 서 있다 핀란드에서 유령들의 춤 같은 오로라를 본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초원에서 도레미 송을 부르고 미라벨 정원을 달린다 그녀는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가 연주되는 비엔나 어느 홀에서 어떤 신사와 서로의 허리와 어깨를 잡고 춤춘다 

 

그러니까 먼 곳이 옷을 벗고 신발을 벗어던지는 춤인가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창문을 닫고 웃으며 약값을 받는다 

 

 

          보호구역 

 

죽은 사람이 웃고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낀다 갑자기 누군가 사진을 끌어안고 울부짖는다 웃고 있는 죽은 자보다 검은 옷을 입고 울부짖는 사람이 더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  

 

가까운 죽음은 왜 심장을 찌르고 먼 죽음은 어떻게 무관심인지 알 수 없는 나는 웃고 있는 죽은 자와 소용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눈물이 떨어진다 손등에 떨어진 눈물이 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다 그 눈물이 내 몸속에서 이상한 벌레로 변할까 봐 나는 얼른 손을 털고 두 손을 모은다 

 

사람들이 죽은 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 누구는 죽은 자 웃음 위에 헛웃음을 던지고 또 누구는 허공에 딴눈을 던진다 혀 위에 남아 있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위로와 슬픔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편한 모습에 꽃으로 둘러싸일 것이다 

 

꽃 속에 죽은 자가 편하게 보인다 죽은 자에게는 최초의 자유인 것 같다 죽은 자가 굴레 없는 보호구역으로 간 것 같다 죽은 자가 웃고 있다 꽃도 웃는 모습이다 누군가 중얼거린다 눈이 오면 좋을 텐데 비가 내리면 좋을 텐데...

 

산자가 울부짖고 죽은 자는 웃고 있다

 

 

          일방통행  

 

그녀가 침대에 누워있다 나는 창문에 기대 창문에 비치는 방을 본다 형광등 불빛이 쏟아지고 방은 어둡다 창밖이 어두울수록 방은 밝게 보이고 더욱더 희게 눈이 내린다 유리창의 서리가 유령의 꽃처럼 번진다 그녀가 창안의 방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창밖의 방을 바라본다 눈과 눈이 창문에서 마주칠 듯 비켜 간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다 아무리 길게 귀를 늘려도 쌓이는 것은 고요 까만 유령들이 들끓고 있다 TV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서 어린 슴새가 날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있다 TV를 보던 그녀가 갑자기 날아, 날아, 날아봐! 중얼거리다 말고 팔을 위아래로 흔들어 본다

 

그녀는 창문 안쪽을 걸었고 나는 창문 바깥쪽을 걸었다

 

우리는 풍경 없는 창문을 보고 있다 잘리고 찌그러진 말들이 어둠을 틈타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창을 마주 보고 기어오르는 그녀의 말이 창안 쪽에서 미끄러지고 내 말은 창밖에서 자꾸만 미끄러진다 눈이 그친다 해가 뜬다 병원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는 도로에 쌓인 눈 때문에 안 보이던 도로 바닥의 일방통행 글씨와 흰 화살표가 선명하게 보인다 

 

유리창의 서리꽃이 사라진다 그녀가 사라진다

 

 

          걱정 인형에 대하여

 

오후라서 오후에는 빈 의자가 많았다 벽에는 낮잠처럼 몇 개의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모든 걱정은 인형에게 주시오” 쪽지가 붙어 있었고 우리는 인형 아래서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과테말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걱정을 대신해 주는 인형 때문에 어른도 아이의 얼굴을 갖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책을 펼쳐 저자의 서명을 받고 그녀를 중심으로 빈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앞에서“치즈”라고 말할 때 입술은 장미가 되었다 우리는 금방 찍힌 사진을 보며 꽃을 문 유령이라고 낄낄거렸다

 

그때 골목이 소란해졌다 부풀어 오른 혀가 골목을 떠다녔다 흥분한 손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이 커피숍 창문을 통하여 다 보였다 무슨 영문인지 한 사람이 무턱대고 의심부터 하는 당신은 의심병 환자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당신 말고는 구청에 신고할 사람이 없다고 삿대질을 해대며 말했다 차갑고 뜨거운 욕설이 마구 날아다녔다 욕설이 부딪칠 때마다 좁은 골목이 움찔움찔했다

 

요 며칠 동안 그녀와 출판기념회의 약속은 늘 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손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잠잘 때 내 베개 밑에는 걱정 인형이 없었다 꽃다발에 기댄  그녀의 희고 가는 목선이 골목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오후가 사라졌기 때문에 저녁에는 빈 의자가 없었다 술잔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술잔으로 걱정이 옮겨 다녔다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걱정이 부풀어 올랐다 고양이들이 빛나는 눈으로 한껏 어둠이 부풀어 오른 골목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창희 시인, 푸른 시학상 수상 소감

 

“푸르다.”는 치열함이다.

 

푸른 잎이 꽃이 되는 10월이었습니다. 64년 만의 한파가 몰려온다는 뉴스를 듣던 중 푸른 시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때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에서 “푸르다.”는 단어가 팔딱거렸습니다. 

 

저는 푸른 잎, 푸른 시학상에서 “푸르다”를 생각했습니다. 푸르다는 풀빛입니다. 풀빛은 노란빛이 약간 도는 녹색입니다. 저는 이 녹색에 물든 약간의 노란빛에 끌렸던 기억을 떠 올렸습니다. 노란빛은 풀에서 보는 푼크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찔린 자국이고 조그만 얼룩이며 작은 상처, 사진 속에서 발견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을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푼크툼이 없는 예술은 이미 생명력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사진에서 뿐만 아니라 시 쓰기에서도 예기치 않은 이미지의 긁힘이나 뒤틀림, 언어의 왜곡과 아름다운 오독을 주는 다양한 푼크툼이 있는 시적 표현을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 수상한 푸른 시학상은 많이 부족한 저에게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쓰라는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푸른 시학상 수상의 기쁨을 안겨주신 심사 위원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조창희 시인 

 

 【약력】

 □2014년 시문학 등단 

 

 

 【편집=이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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