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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10)

갈대 ⓵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기사입력 2020/10/31 [18:44]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10)

갈대 ⓵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입력 : 2020/10/31 [18:44]

                                         

     ▲ 갈대.                                                                                      © 포스트24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10)
                                                                        -갈대⓵


                                                                                                    한 상 훈(문학평론가)


바야흐로 갈대의 계절이다. 갈대는 전국의 습지 및 강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 군락을 이루고 있는 식물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성남의 탄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율동공원의 갈대숲은 호수를 끼고 있어 더욱 아름답다.
우선 ‘갈대’를 대상으로 쓴 몇 편의 시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농무」나 「목계장터」로 잘 알려진 민요시인 신경림(1936~)은 「갈대」(1956)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다.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시인은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농무」)처럼 농민들의 소외감이나 절망을 주로 토로했다. 하지만 그의 초기 시 「갈대」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에 대해 성찰한다. ‘저를 흔드는 것’은 ‘바람’이나 ‘달빛’과 같이, 갈대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현실이 아니라, ‘제 조용한 울음’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내면화된 울음 속에서, 인간 존재의 비극적 깨달음을 자각한다.


신경림 시에 나타나는 ‘갈대’의 ‘조용한 울음’은 박형준 시인(1966~)의 「겨울 갈대밭」에 이르면 더욱 고조되면서 ‘울음 소리’가 커지고 있다.

“겨울 갈대밭에 갈대들은 서로의 몸 비비다 지쳐서 운다/ 울음이 커질 때마다 서로를 더욱 휘감으며/ 엎어지는 갈대들/ 무릎이 깨진 아이가 시뻘건 피를 보고/ 우와 우와 울 듯이”

겨울 갈대밭의 갈대들이 추위와 바람에 떨며 흔들린다. 시인은 거기서 외롭고 쓸쓸한 서민들의 모습을 본 것일까. “울음이 커질 때마다 서로를 더욱 휘감으며 엎어지는/ 겨울 갈대밭”이라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서민들이 삶의 고통이 클수록 더욱 껴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는 갈대숲이 지닌 집단적 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군집을 이루고 있는 갈대숲의 풍경은, 이처럼 시인들에게 ‘민중’이나 ‘집단’의 성격으로 문학 속에 형상화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온갖 시련을 겪어온 중년 이후의 삶에서 오는 내면적 슬픔을 ‘갈대’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여!”(임영조, 「갈대는 배후가 없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온갖 욕망을 비우고 나서, 화자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채워나가는 무거움에 지쳐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면서, 생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고정희 시인(1948~1991)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는 시련이나 고난에 대한 저항이 스며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결해나가야 한다는 고정희 시인의 시정신이 독자들에게 힘찬 파동을 일으키며 전달되고 있다. 선구적 여성운동가였던 고정희는 안타깝게도 지리산 등반 중 사고로 작고한다. 1990년에 발표된 이 시는, 아직 정착되지 못한 사회 현실에 대한 민주화와 남성들에 비해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을 향한 메시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인 유안진(1941~)의 경우는 다른 시각에서 ‘갈대’를 바라본다.

“지난 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 손/ 갈대꽃은 피었어라”(「갈대꽃」)

 

강가에 은빛으로 아름답게 피어난 갈대꽃을 바라보며, 시적 화자는 이별의 슬픔에 젖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꽃의 풍경은, 지난 여름 가슴 아팠던 사랑의 상처를 떠오르게 한다. 갈대꽃은 ‘그대의 흰 손’으로 조형화된다. 시인의 시적 발상이 갈대꽃만큼 아름답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황순원(1915~2000)의 단편 「소나기」에도 ‘갈대’ 이미지가 눈에 띈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로 이야기가 시작하는 이 소설에는 갈꽃, 메밀꽃,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 마타리꽃, 등꽃 등 여러 가지 꽃 이름이 나온다. 거기에 징검다리, 조약돌, 비단조개, 허수아비, 참새, 메뚜기, 원두막, 참외, 단풍잎, 초가집, 수수밭 같은 향토적 단어들이 소설 공간의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소녀는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고나더니, 물속에서 하얀 조약돌을 끄집어낸 후,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소년이 있는 쪽으로 돌아보곤 ‘이 바보’하고 외친다. 그 다음엔, 소년을 향해 조약돌을 던지고, 갈밭 사잇길로 들어선다.
“저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움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래도 서 있었다.”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대목은, 소년의 소녀에 대한 내면적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갈꽃’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며, 또한 소년의 소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매체로서 작용하고 있는 소도구이기도 하다.

 

이번엔 독일의 여류작가인 안나 제거스(Anna Seghers)의 단편 「갈대」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이 소설은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농장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엠리히 집안의 소유인 이 농장은 고명딸인 마르타가 혼자 농장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이곳 주변에 길도 잘 만들어져 있었고 대장간과 여관까지 딸려 있었으나, 그것들을 그녀는 먼 친척들에게 빼앗겼다.


마르타의 부모는 전쟁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죽은 아내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말발굽에 차여 죽은 것이다. 그녀에겐 오빠가 둘 있는데, 군에 징집되었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복무기간이 무기한 연장되었다. 마르타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웃 마을의 농부 아들과 약혼하였으나, 그 사람 역시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만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현실의 고난을 묵묵히 견디면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것이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낯선 사나이(스타이너)가 찾아온다. 그는 전쟁 참여를 기피한 젊은이였다. “내가 일하던 곳에서 반전 움직임이 있었죠. 그런데 오늘 그 죄를 내가 뒤집어쓰게 되었단 말이오.” 그녀는 고민하다가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 하고, 울타리 쪽에 숨겨주고 음식도 갖다 준다. 그러다가 보다 안전한 지하실로 그를 은폐시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농장에 허드레 일을 도와주면서, 외롭게 지내왔던 그녀와 대화를 하게 되고, 점차 서로 가까워진다. “베를린 공습 때 그녀는 밤마다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사나이에게 찰싹 붙어 방공호로 피신하곤 했다.”


이처럼 다정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한 농부의 아낙네가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도망자들을 정부에서 집집마다 수색한다고 알려주었다. “도망쳐야겠소. 그러지 않으면 당신마저 위험해질 테니 말이오.” 수심에 가득차 있던 마르타는 언젠가 작은 오빠가 이야기 해준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물속으로 들어가 갈대로 숨을 쉬며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갈대 줄기’는 곧게 자라나며, 속이 비어 있고, 여러 대가 뭉쳐 자라는 속성이 있는 점에 근거한 말이었다. 마침내 호숫가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경찰이 마르타의 농장을 수색하러 오게 되고, 사나이는 물속에 숨어서, 갈대 줄기를 입에 대고 숨을 쉬었다. 경찰들이 그녀의 농장을 여러 번에 걸쳐 수색할 때마다, 사나이는 물속에 들어가 갈대 줄기를 통해 숨을 쉬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베를린은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났다. 그들은 기뻐하며, 부부처럼 지냈다. 어느 날 사나이(스타이너)는 바깥에 나가서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하더니, 베를린의 새 행정부에 일자리가 생겼다며, 그녀를 떠났다. 한편 포로로 잡혀갔던 큰 오빠가 농장에 돌아왔다. 오빠는 농부의 아내와 결혼 하고나선, 마르타를 박대하고 마구 부려먹었다. 마르타는 스타이너에 대한 그리움에 잠겼는데, 어느 날 그가 아내와 함께 와서 다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신과 내가 겪은 일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야” 하면서 스타이너는 베를린의 주소를 가르쳐주고 곧 떠났다. 마르타는 계속 오빠에게 시달리었고, 그럴수록 그 사나이가 생각이 나서, 그가 가르쳐준 베를린의 주소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사를 가버렸다. 그녀는 그리움 속에 세월을 보내다가, 떠돌이인 클라인을 만나 눈이 맞아 결혼하게 되고, 금슬 좋게 살아간다.


이 소설에서, ‘갈대’는 작가가 ‘제목’으로 선택할 만큼, 서사 전개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모는 죽고 오빠들은 전쟁터에 나간 상태에서, 외롭고 순진한 여성 마르타는 전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수배자를 숨겨준다. 그러다가 사랑이 싹트고, 집안이 수색당하는 위기에 처하자, 그녀의 지혜로 ‘갈대 줄기’를 이용하여, 그를 숨겨주는 데 성공한다. 즉 ‘갈대’는 그들의 사랑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체 역할을 함과 동시에 외부의 시련이나 고난을 극복하게 해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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