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10)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시인은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농무」)처럼 농민들의 소외감이나 절망을 주로 토로했다. 하지만 그의 초기 시 「갈대」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에 대해 성찰한다. ‘저를 흔드는 것’은 ‘바람’이나 ‘달빛’과 같이, 갈대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현실이 아니라, ‘제 조용한 울음’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내면화된 울음 속에서, 인간 존재의 비극적 깨달음을 자각한다.
“겨울 갈대밭에 갈대들은 서로의 몸 비비다 지쳐서 운다/ 울음이 커질 때마다 서로를 더욱 휘감으며/ 엎어지는 갈대들/ 무릎이 깨진 아이가 시뻘건 피를 보고/ 우와 우와 울 듯이” 겨울 갈대밭의 갈대들이 추위와 바람에 떨며 흔들린다. 시인은 거기서 외롭고 쓸쓸한 서민들의 모습을 본 것일까. “울음이 커질 때마다 서로를 더욱 휘감으며 엎어지는/ 겨울 갈대밭”이라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서민들이 삶의 고통이 클수록 더욱 껴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는 갈대숲이 지닌 집단적 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군집을 이루고 있는 갈대숲의 풍경은, 이처럼 시인들에게 ‘민중’이나 ‘집단’의 성격으로 문학 속에 형상화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온갖 시련을 겪어온 중년 이후의 삶에서 오는 내면적 슬픔을 ‘갈대’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여!”(임영조, 「갈대는 배후가 없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온갖 욕망을 비우고 나서, 화자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채워나가는 무거움에 지쳐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면서, 생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고정희 시인(1948~1991)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에서는 시련이나 고난에 대한 저항이 스며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 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결해나가야 한다는 고정희 시인의 시정신이 독자들에게 힘찬 파동을 일으키며 전달되고 있다. 선구적 여성운동가였던 고정희는 안타깝게도 지리산 등반 중 사고로 작고한다. 1990년에 발표된 이 시는, 아직 정착되지 못한 사회 현실에 대한 민주화와 남성들에 비해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을 향한 메시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인 유안진(1941~)의 경우는 다른 시각에서 ‘갈대’를 바라본다. “지난 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 손/ 갈대꽃은 피었어라”(「갈대꽃」)
강가에 은빛으로 아름답게 피어난 갈대꽃을 바라보며, 시적 화자는 이별의 슬픔에 젖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꽃의 풍경은, 지난 여름 가슴 아팠던 사랑의 상처를 떠오르게 한다. 갈대꽃은 ‘그대의 흰 손’으로 조형화된다. 시인의 시적 발상이 갈대꽃만큼 아름답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황순원(1915~2000)의 단편 「소나기」에도 ‘갈대’ 이미지가 눈에 띈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 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로 이야기가 시작하는 이 소설에는 갈꽃, 메밀꽃, 들국화, 싸리꽃, 도라지꽃, 마타리꽃, 등꽃 등 여러 가지 꽃 이름이 나온다. 거기에 징검다리, 조약돌, 비단조개, 허수아비, 참새, 메뚜기, 원두막, 참외, 단풍잎, 초가집, 수수밭 같은 향토적 단어들이 소설 공간의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대목은, 소년의 소녀에 대한 내면적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갈꽃’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며, 또한 소년의 소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매체로서 작용하고 있는 소도구이기도 하다.
이번엔 독일의 여류작가인 안나 제거스(Anna Seghers)의 단편 「갈대」를 감상해 보기로 한다. 이 소설은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농장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엠리히 집안의 소유인 이 농장은 고명딸인 마르타가 혼자 농장을 지키고 있다. 한때는 이곳 주변에 길도 잘 만들어져 있었고 대장간과 여관까지 딸려 있었으나, 그것들을 그녀는 먼 친척들에게 빼앗겼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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