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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13, -시공간의 ‘느티나무’

한상훈 문학 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4/11/18 [21:56]

문학 산책 13, -시공간의 ‘느티나무’

한상훈 문학 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4/11/18 [21:56]

 ▲ 느티나무                                                                                                   © 포스트24



                                문학 산책 13

                                        -시공간의 ‘느티나무’

 

                                                                                           한 상 훈 평론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 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경림, 「다시 느티나무가」 전문

 

1연과 2연이 대립적 구도 속에 전개된다. 시인이 어렸을 적에 고향의 느티나무를 쳐다보면 목이 아플 정도로 엄청나게 커 보였지만, 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되었을 땐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구절은 중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화자가 커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느티나무가 작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느티나무와 같은 자연의 풍경이 이제는 내 마음에서 사라졌기에 작게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유년 시절엔 아름답고 신비롭게 여겨졌던 고향이나 자연의 풍경이 어른이 되어서는 누구나 그렇듯이 시시해지고 말았다는 것. 대신 그 자리에 도시문명의 지배적 질서인 거대한 자본의 논리가 들어서게 되고, 시적 화자는 도시공간의 바쁜 일상 속에서 남들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 시절 고향의 느티나무는 “보이거나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 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라는 표현처럼 시인에게 예전처럼 특별하게 다가오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 여기까지가 1연의 이야기로, 화자가 청년이 되고 중년에 이르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연은 노년이 되었을 때 이야기. 어느 날 고향에 갔더니, 그 느티나무가 어린 시절처럼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병든 것은 아닌가, 이제 늙어서 그런 것인가, 하고 잠시 절망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는 것. 왜 서러워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시인의 진술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느티나무가 다시 커 보인 이유는 노년이 되어 이젠 시력도 떨어지고 몸도 작아진 신체적 이유가 있었을 것. 

 

하지만 그것보단 노년의 시간의 여유 속에 비로소 진정한 삶의 결이 무엇인지 자각했기 때문일 터. 세상을 움직이는 문명의 매너리즘에 매달려왔던 일상이 가치 없는 삶이었음을 새삼 깨달았기에 서럽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 

 

3연의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라는 표현은 2연의 내용과 밀접하게 조응된다. 시인의 세상에 대한 달관과 초월의 자세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시는 안락한 삶의 거점을 중시하던 중년기를 벗어나 인생을 되돌아보는 노년기의 반성적 성찰이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은 노년에 이르러, 젊은 시절의 욕망이나 집착을 조금씩 비워내기 시작했을 때, 그와 동시에 그동안 작게만 보였던 고향의 ‘느티나무’가 다시 어린 시절처럼 크고 아름답게 보였던 시인의 심리적 변화를 비유의 전략을 통해 극적으로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호소하듯 전달하는 독백조의 어조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잔잔한 감정의 파문을 일으킨다.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내었다

 

잔가지 끝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며 그는

한 그루 용수처럼

제 아궁이에서 자꾸만 잎사귀를 꺼낸다

번개가 가슴을 쪼개고 지나간 흔적을 안고도

저렇게 눈부신 잎을 피워내다니,

시커먼 아궁이 하나 들여놓고

그는 오래오래 제 살을 달여 놓는다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 하는,

바람도 가만히 숨을 모으는 그 검은 아궁이에는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

까마귀 깃들었다 날아간 자리에

검은 울음 몇 가지가 뻗어 있기도 한다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

  -나희덕, 「聖(성) 느티나무」 전문

 

느티나무는 옛날부터 그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의 역할을 맡았다. 나희덕 시인이 시적 대상으로 삼은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그러한 성격의 나무일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비바람이 몹시 불고 천둥 번개 치는 어느 날, 벼락을 맞고 가슴 한가운데가 크게 구멍이 나버렸다. 그럼에도, “속이 검게 타버린 고목이지만/ 창녕 덕산리 느티나무는 올봄도 잎을” 낸 것이다. 검게 타버린 구멍의 모습이기에 ‘아궁이’로 비유되고 있는 느티나무의 심장과 같은 한복판을 바라보며, 시인은 경이로운 생명의 힘을 느낀다. 

 

이미 죽어버린 고목인 줄 알았더니, 그 ‘아궁이’에서 연녹색 잎을 계속 내고 있었던 것. 더욱 놀라운 점은, “낮의 새와 밤의 새가 다녀가고/ 다람쥐 일가가 세들어 사는,/ 구름 몇 점 별 몇 개 뛰어들기도”라는 구절처럼 새와 다람쥐의 삶의 터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물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도 힘들어 지칠 때면,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떠오르는 것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생적으로 인내하면서 살아온 한국의 전통적 여인상이다. 즉 모성적 삶의 형상을 이 시의 이미지에서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시인의 직접적인 종교적 언술은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죽은 줄 알았던 느티나무의 소생과 희생적 사랑은 기독교의 부활과 생명의식과 관련을 갖는다. 

 

그 아궁이에서 “모든 빛이 모여 불타고 모든 빛이 나온다”라는 시인의 진술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다분히 종교적 생명의식이 암시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발이 묶인 채 날아오르는 새처럼/ 덕산리 느티나무는 푸른 날개를 마악 펴들고 있다”에서 ‘푸른 날개’는 생명이나 비상의 이미지로 볼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비유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검게 쪼개져 버려 폐허가 되어 버린 나무의 가슴 속에서, 기어이 새 잎을 내고야마는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이 이 시의 외관에 나타난 의미라면, 그 ‘아궁이’가 온갖 생물과 자연을 포용하는 구절에선 대지의 모성을 넘어선 종교적 경건함이 자리잡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자연에 대한 통찰에서 도출해내는 시적 사유가 깊고 예리하다.  

 

잠시 앉아 허리를 펴거나 둘러앉아 마을 대소사를 의논하던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낸 그 자리에 새마을회관이 들어섰다.

준공식 날, 면장이 오고 군수가 오고 국회의원이 왔다.

오색테이프를 끊고 사진을 찍었다.

동네가 환해졌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읍내 장을 보고 돌아올 때마다 길을 잃었다.

들녘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소들도 음매 음매 목을 놓았다.

   -윤효, 「느티나무」 전문

 

농촌의 전통적 삶의 풍경이 근대화에 밀려 뿌리 뽑혀야 했던 시대적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잘살아 보세’라는 슬로건과 함께 ‘새마을 운동’이란 이름으로 농촌을 빈곤에서 몰아내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농촌의 초가지붕을 함석지붕으로 바꾸는 지붕의 개량사업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농촌의 생활 개선의 상징적 사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농촌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던 것. 

“잠시 앉아 허리를 펴거나 둘러앉아 마을 대소사를 의논하던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낸 그 자리에 새마을회관이 들어섰다.”처럼 마을마다 그 입구에 있던 느티나무와 같은 큰 정자나무들을 잘라내고 길을 넓힌 것이다.

  

느티나무는 예로부터 농촌의 마을 입구에 심어져 왔다,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넓게 퍼져서 짙은 녹음을 형성하기에 무더운 여름철에는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고마운 나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느티나무 대신 ‘마을회관’이 새로 들어선 것이다. 

 

물론 농촌의 근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회관’은 농부들이 자치적으로 모여서 마을의 공동재산을 운영하고 관리하기도 하고, 마을의 행정적 기능을 두루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역기능이 있었는데, 시인은 그러한 역기능을 이 시에서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요컨대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발전과 소득 증대를 가져왔으며. 농민들의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운동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나, 토속적이고 아름다운 전통의 상실을 가져오게 된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을의 수호신 같은 느티나무를 잘라내어 길을 확장하여 사람들은 “동네가 환해졌다고 했”으나, 정작 더 소중한 시골 전통의 정서를 잃어버렸던 점을 시인은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골의 전통적 공간의 상실은, 농촌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따뜻한 인정과 정서도 함께 상실되어 버리는 계기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읍내 장을 보고 돌아올 때마다 길을 잃었다./ 들녘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소들도 음매 음매 목을 놓았다.”라는 표현은 바로 농촌의 근대화로 인한 상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재치 있게 비유한 구절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준공식 날, 면장이 오고 군수가 오고 국회의원이 왔다./ 오색테이프를 끊고 사진을 찍었다.”라는 진술을 통해 정치인들이나 마을의 군수들이 ‘마을회관’을 기껏 자기들의 선전 도구로 활용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인들의 꼴불견은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에, 시인은 지나간 그 시절을 빗대서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한상훈 평론가.                                                      © 포스트24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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