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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11,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미우라 시」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4/09/18 [21:28]

문학 산책 11,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미우라 시」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4/09/18 [21:28]

 

  © 포스트24

 

단편 「유미우라 시」의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삶을 잠깐 살펴보자.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였으나, 의사였던 아버지를 두 살 때 여의고, 그다음 해에는 어머니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조부모와 함께 살게 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곱 살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열다섯 살엔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외가 친척들에게 맡겨진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어려서부터 타인과의 관계에 무척 민감해진다. 남달리 고독과 외로움에 갇혀 살면서, 삶의 공허를 짙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대학시절에는 여자 쪽의 일방적인 파혼으로 가슴 아픈 실연까지 겪는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비롯된 사랑 결핍과 고독, 외로움의 직접적 체험은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12년이나 걸려 완성된 노벨문학상 수상작(1968)인 『설국』 등 그가 발표한 많은 소설들이 이러한 성장 과정의 독특한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지 4년 후인 1972년, 73살에 그는 가스를 마시고 사망한다. 유서 한 줄 남기지 않은 그의 자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많다.

이번에 소개할 단편 「유미우라 시」로 들어가 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가’이지만, 그러한 작품들이 그렇듯이 지식인의 고뇌나 갈등, 이상과 현실의 어긋남에서 오는 좌절을 다룬 글은 아니다. 이 글은 기억 상실 모티프가 중심 서사이다. 다음은 소설의 첫 장면이다.

 

30년 전쯤 규슈의 유미우라 시에서 만나 뵌 적이 있다는 한 부인이 찾아왔다고 딸아이가 들어와 알렸다. 가스미 쇼스케는 그녀를 사랑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소설가인 가스미에게는 매일 예고도 없이 불시에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도 사랑에는 세 사람이 와 있었다. 그들은 각자 따로따로 왔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2월 초치고는 포근한 오후 2시경이었다. 

네 번째 손님인 그 부인이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장지문을 연 채 먼저 와 있는 손님들을 조심하는 듯 머뭇거리자, 가스미는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이것 참, 정말로······.”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금은 성이 무라노입니다만, 전에 뵈었을 때는 다이라 했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신지요?”

가스미는 그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쉰을 약간 넘은 듯하나 나이보다는 조금 젊게 보였으며, 하얀 살결에 양 볼이 불그스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커다란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중년이 되어서도 살이 찌지 않은 때문인지도 몰랐다.

“역시, 바로 그 가스미 씨가 틀림없으시군요.”

부인이 반가움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가스미를 바라보는 시선과, 가스미가 부인을 기억에 떠올리려 애쓰며 보는 시선과는 기세가 전혀 달랐다.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귀에서부터 턱, 맞아! 그 눈썹 언저리도 꼭 그대로······.”

이처럼 하나하나 꼬집어서 말하는데, 가스미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어색하기도 하고 위축되기까지 했다.

  - 「유미우라 시」에서

 

윗글에 나타난 것처럼, 어느 날 30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한 부인이 소설가인 가스미를 찾아온다. 가스미는 먼저 와있는 손님들이 있었지만 그녀를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녀는 제가 기억나지 않느냐며 가스미를 보고 반가워한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흘러간 세월 속에서 그녀를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그녀는 가스미가 눈썹언저리며 귀, 턱이 그대로라며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규슈의 유미우라 시에서 잠깐이지만 같이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항구에 축제가 열리던 날의 황혼녘”이 기억나지 않나요? 

 

30년 전이면 가스미가 결혼 전이었다. 그 당시에 유미우라 시에 작은 신문이 창간되어 기자로 있었던 그녀를 가스미가 만났다는 것이다. 가스미는 그랬던가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그의 변화된 표정에 자신감을 갖고, 구체적으로 지난날의 추억을 되살린다. 

 

“목덜미에 가스미 씨의 시선이 머무르자 무엇에라도 찔린 듯 피했던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요.” 

 

신문사의 축하파티가 끝나고 우리는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저녁 노을이었어요.” “그대의 목덜미까지도 빨간빛인 듯하다고 가스미 씨가 말씀하신 것을 잊을 수 없어요.” 

 

소설가(가스미)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여전히 무언가 시원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그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이야기하며 재차 기억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과거의 추억이 공유되지 못한 채 그녀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글은 한 쪽은 과거의 사실을 기억하고 있고, 다른 쪽은 기억해내지 못하기에, 서로 소통이 되지 못하고 안타까움만 느낀다. 주인공이 50대이니 젊은 시절의 기억이 그렇게 희미해질 때는 아니다. 하지만 30년 전 이야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또한 남녀 사이니, 연정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다. 당연히 소설가를 찾아온 중년 부인의 그리움이 진하다. 

 

“가스미 씨처럼 행복하고 바쁘기까지 한 분은 옛날의 하찮은 일 따윈 회상할 틈도 없으실 테고, 기억하고 계실 필요도 없겠지만.....제가 이제까지 머무른 곳 중에서 유미우라는 가장 멋진 고장이었습니다.” 

 

가스미는 그곳에서 오래 계셨느냐고 묻는다. “불과 7개월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부모 몰래 그곳의 기자로 취직을 했다가, ‘신관’을 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가스미는 그녀 집안의 불화를 직감한다. 그녀는 전쟁 이후로 궁핍해졌다고 말한다. 다시 가스미와의 예전의 행복한 나날로 돌아간다. 

 

“추억이란 참으로 고마운 것이더군요. 인간은 어떤 경우에 처해도 옛일을 기억할 수 있다니, 그건 분명 신이 내린 은총일 겁니다.” 하지만 가스미는 여전히 그녀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으로 머물 수 없어 답답함을 느낀다. 

 

“가스미는 그 나이치고는 남들보다 훨씬 기억력이 노쇠했다. 낯익은 사람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사람의 이름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럴 때는 불안한 마음에 더하여 두렵기까지 한다. 지금도 부인의 이야기에 기억을 되살려 내려고 허공을 붙잡느라 그의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여자의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인 ‘방’ 이야기까지 하는데, 그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자 괴롭기까지 했다. 그 표정을 알고 나서, 부인은 다음에 또 와서 이야기를 해도 되겠느냐고 묻곤 돌아갈 인사를 한다. 현관에서 신을 신고 있는 그녀에게 가스미는 당신의 ‘방’에까지 내가 들어갔냐고 확인하듯 묻는다. 

 

“결혼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지요. 바로 제 방에서” 

 

지금 남편과 약혼 중이었기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스미는 어떻게 아무리 기억력이 나쁘다고 젊은 시절에 청혼한 여자까지 모를 수 있을까 하고 놀라움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지갑에서 아들과 딸이 같이 찍은 사진을 꺼낸다. “딸은 저보다 키는 훨씬 큽니다만, 젊었을 때 제 모습을 꼭 닮았습니다.” 가스미는 사진 속의 귀여운 딸의 모습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언젠가 딸아일 데리고 찾아 뵐 터이니, 30년 전 제 모습을 봐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아들과 딸들에게도 가스미 씨 이야기를 했고, 어쩌면 이 딸아인 가스미 씨의 애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녀가 나 때문에 “비정상적인 불행”에 빠진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불행한 현재의 삶을 나에 대한 추억으로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 아닐까. 이제 가스미는 애틋한 추억에 대한 기억 찾기보단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빠진다.

 

그런 상태에서 그녀는 가버린다. 

그녀가 가자마자 가스미는 곧바로 일본 지도를 자세하게 살펴본다. 그런데 규슈의 어느 곳도 ‘유미우라’란 시는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 전에는 규슈에 간 적도 없었다.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망상’ 아니냐고 하면서 웃는다. 

그러나 가스미는 계속 그녀와의 기억을 찾으려고 애썼다. “타인에게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의 과거”에 대해 결코 소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캐릭터 간에 잘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 점은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 듯하다. 하지만 그 ‘불화’가 빈부의 차나 이념, 종교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서로 간에 공유했던 기억의 영토가 오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지워져버린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공유하지 않았던 곳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확신을 갖고 아름다웠던 추억을 세세하게 말하고 있다. 

 

시종 평소에 기억력이 나쁜 소설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지 못하는 자신을 답답해한다. 그러다가 청혼까지 했고, 그녀의 딸이 내 아이일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자 적잖이 당혹해 한다. 

하지만 그녀가 가버리고, 궁금해서 그 도시를 지도에서 찾았지만 나오지 않는다. 이 부분은 극적 반전에 해당된다. 주변에서 같이 듣던 사람들이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 가스미는 ‘나’에 대한 그녀의 ‘추억’에 소중함을 느끼고, 계속 ‘기억’을 더듬어 나간다. ‘기억’이 타인에게 남아있는 한, 죽어서도 내 ‘생’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한상훈 문학평론가               © 포스트24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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