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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9, -아사다 지로의 「수국꽃 정사」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4/07/17 [20:11]

문학 산책 9, -아사다 지로의 「수국꽃 정사」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4/07/17 [20:11]

  © 포스트24

 

                                        문학 산책 9

                                     -아사다 지로의 「수국꽃 정사」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아사다 지로(1951~)의 단편 「수국꽃 정사」. 그는 오래전에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 「철도원」(2000)의 작가다. 「철도원」은 그에게 나오키 상(直木賞)(1997)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감상할 「수국꽃 정사」는 『장미도둑』이라는 작가의 단편집에 실려있다. 

 

이 소설은 도쿄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가야 되는 어느 온천 관광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는 사람들이 붐빌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으나, 일본 경제가 나빠지고, 신칸센이 개통되면서 숙박하는 사람들도 줄어 점차 몰락해가는 마을이 되고 있었다. 

 

“계곡 건너편에 몇 채나 되는 여관들은 모두 철근으로 지은 번듯한 건물인데도 폐가처럼 황폐해져 있었다. 창가에 매달린 커튼이 군데군데 찢겨진 채 깨진 유리문 사이로 삐어져 나와 팔락거렸고 옥상과 발코니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이곳에 정리해고 당한 전직 카메라맨인 주인공 기타무라가 충동적으로 찾아온다. 그는 지방 경마장에서 큰돈을 날리곤, 온천여관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5천엔이나 되는 팁을 주는 허세를 부린다. 대형 출판사 사진부에서 이십 년 남짓 일해온 사십대 후반의 그는 회사에서 정식 통고 오기 전에 미리 사직서를 내버렸다. 

구입한 주택의 장기불입금도 남았고 애들은 대학생부터 줄줄이 셋이나 된다. 가족들에겐 이제부턴 프리랜서라고 큰소리 치고, 직업안내소와 경마장을 전전한지 벌써 석 달이 흐른 것이다. 

 

“넥타이를 매는 것은 장례식 때뿐이고, 매일 아침 면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을 싫어하는 원만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기타무라는 돈 계산마저 매우 서툴렀다. 그는 온천여관에서 저녁 식사 후 바깥에 나갔다가, 삐끼가 하도 붙들어서 “창극 무대 같은 스트립극장”에 들어갔다. 

 

“무희는 온천가 여자답게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피부와 몸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스트립쇼를 보는 손님들이 몇몇 있었지만, 어느새 기타무라 혼자만 남았다. 그는 혼자여서 바깥으로 나가기도 좀 곤란했다. 사실, 이 스트립 극장은 사십대 초반의 나이로 거의 벌거벗은 채 춤추는 늙은 무희와 조명실에서 불을 비추고 멘트도 가끔 날리는 극장 주인인 닷짱, 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닷짱은 여든 살 된 노인이다.  

 

“그냥 허름한 극장 주인과 한물간 춤꾼일 뿐이예요. 하긴 십 년이나 함께 살았으니 남편까지는 아니지만 아버지 같다는 생각은 들데요.” 

 

스트립 걸은 손님이 혼자 있으니 쑥쓰러워 못하겠다며 무대에서 내려와 기타무라에게 술을 사달라고 조른다. 그는 장마 때문에 눅눅해진 온천마을에서 스트립 걸과 밤새 술을 마시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어느 주점으로 간다. 

 

“도쿄 무대에서는 성인용 비디오 찍었다는 예쁘고 잘빠진 애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어요. 게다가 어제까지 번듯한 회사 잘 다니던 애들에다 멀쩡한 여대생들까지 스트리퍼가 되겠다고 나서더라구요. 그러니 나 같은 게 어떻게 버텼겠어요?” 

  

십여 년 전에 그녀가 이곳 온천마을로 왔을 때는 경기가 좋아 무희가 7명이나 되었고, 여름 경마철에는 자리가 없어서 서서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트립 걸인 릴리는 그 당시 스타여서 도쿄에서 그녀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있을 정도였는데, 남자와 여자란 그냥 “하루저녁 즐거우면” 그만 아니냐는 식으로 살아온 여자였다. 

 

이 소설은 인생의 막장에 들어선 두 캐릭터의 윤리적 타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따뜻하고 착한 심성으로 작가가 형상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사다 지로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삶의 변방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어두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두 인물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잔잔히 흘러갈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독자들은 이들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고, 사회현실의 부조리를 조금씩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럼없이 릴리는 자기 생활의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불경기로 온천마을이 몰락해 가고 자기도 늙어서 인기가 떨어져서, 닷짱과 둘만 있는 스트립 극장도 이젠 한산하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라이브 쇼는 계속한다는 것이다. 

 

“무대에 매트 깔아놓고 손님하고 그거 하는 거예요. 희망자들끼리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 셋하고만.” 

 

이처럼 술집에서 스트립 걸인 릴리가 자기가 살아온 내력을 기타무라에게 늘어놓는 이야기 속에는 척박한 일본 사회의 퇴폐적인 풍조가 리얼하게 드러나고 있다. 릴리는 열일곱 때 부인이 있는 초밥집 주반장과 살림까지 차리고 애까지 있었는데, 아이를 빼앗기고 남편도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시시콜콜한 하소연들을 잘 들어주는 기타무라와 술집을 나와 함께 온천으로 간다. 여긴 물이 펑펑 잘 쏟아지는 온천인데 요즘엔 사람도 없고 해서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천수가 물방울을 튀기며 떨어지는 수로를 따라 완만한 비탈길을 내려가니 오래된 목조온천이 있었다. 주위는 온통 이야기 속에나 있을 듯한 수국 꽃밭이었다. 흰빛, 보랏빛 수국꽃을 몽글몽글 자욱한 김이 살포시 감싸고 있었다.” 

 

이 소설은 서사가 한참 진행된 가운데 ‘수국’의 묘사 장면이 처음 나오는데 무척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띤다. 처음 만난 남녀에게 낯설음의 장벽이 있을 법한데, 그러한 경계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양자 사이의 친밀한 정감이 수국의 배경 장면과 함께 아름답게 대응을 이룬다. 또한, 두 캐릭터의 대화 속 감정은 매우 진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나, 화장 지워도 비웃지 마세요. 진짜 아줌마거든요. 미리 약속해요.” 

 

이 대목은 비록 밑바닥 인생으로 허접스럽게 살아온 터에 낡고 낡았지만, 릴리의 수줍어하는 여성적 성격이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마치 황석영(1943~)의 단편 「삼포가는 길」(1973)에서 영달이와 정씨랑 동행하게 되는 술집 작부 ‘백화’를 연상하게 한다. 온천 안에는 기타무라와 릴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녀의 넋두리는 계속 이어진다.

  

남편에게 빼앗긴 그 아들의 이름은 가즈히코이다. 어느 날 그 남자 아이가 커서 스트립 걸인 자기가 일하는 극장 앞에 우연히 나타난 것이다. 즉 도쿄에서 대학생들이 합숙을 하러 온 적이 있었는데, 스트립 쇼를 보겠다고 친구들과 함께 온 것이다. 

 

“그 애 앞에서 허리를 내밀고 다리를 벌렸을 때의 내 기분, 알겠어요?” 

 

기타무라는 그녀의 가슴에 묻힌 슬픈 사연들을 들으면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위로를 해준다. 40대의 늙은 스트립 걸 릴리는 기타무라에게서 삶의 위안을 받고, 오랜만에 정서적 따뜻함을 느낀다. 온천에서 목욕을 끝내고 기타무라는 먼저 나온다. 

 

“안개비가 굵은 빗방울로 바뀌어 있었다. 활짝 핀 꽃봉오리를 숙이고 그 비를 다 맞으며 용서를 구하듯 흔들리는 수국을 바라보며 기타무라는 멍하니 서서 릴리를 기다렸다.” 

 

빗물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수국의 풍경은 바로 그녀의 이미지다. 쓸쓸하고 허허로운 그녀의 마음과 수국의 풍경이 잘 조응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타무라와 허물없이 가까워진 릴리는 긴 입맞춤 뒤에 그에게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고 청한다. 기타무라는 잠을 같이 자자는 말인 줄 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더니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부탁이에요. 나하고 같이 죽어줘요.”

 

이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다. 작가의 뛰어난 소설적 전략이 엿보이는 대목이고, 읽어나가는 독자들에겐 칼날에 베이는 듯한 섬뜩함을 준다. 이 소설의 서사가 삼류 인생의 소외의 사회학을 밑바닥 인생의 섹슈얼한 소재의 이야기로 전개하다가 본질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로 급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타무라는 그녀가 부탁한 동반자살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 부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기타무라의 마음은 소설 속에서 그렇게 세밀하게 드러난 것은 없다. 그는 그녀에 대한 삶의 연민 속에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본다.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사고 희생자의 네 배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리해고 당해 길거리를 헤매게 된 주제에 자살도 하지 않고 구차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후반 장기간에 걸쳐 경제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사회의 단면을 작가 아사다 지로는 기타무라의 내면세계를 통해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다, 기타무라는 동반자살의 죽음 앞에서 가족을 생각해 본다. 주택의 장기불입금에는 생명보험이 같이 붙어 있었다. 즉 자기가 죽으면 즉시 장기불입금이 없어지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생명보험을 들은 게 있어서 가족들이 충격은 받겠지만 경제적으론 오히려 지금보다 나을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그는 동반자살하자는 그녀의 부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여유 있게 계획한다. 기타무라는 여관에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을 걱정한다. 릴리는 미리 계획했다면 약을 준비했을 텐데, 목매는 것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고 한다. 서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농담을 해가며 밤이 깊어간다. 

 

“개울물 소리를 비집고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한밤중에 구급차가 이 마을로 달려온 것이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고 여관의 여주인이 스트립 걸 릴리를 찾았다. 릴리와 오랜 기간 같이 지내왔던 극장 주인인 닷짱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극적 반전에 해당되며 앞에서 동반자살을 하자던 그녀의 귓속말보다 더 큰 충격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낡고 퇴락한 극장에서 평생을 보낸 팔십 세 늙은이인 닷짱의 목맨 자살은 수국꽃 같은 릴리와 기타무라의 목숨을 살린다.  

  

다음날 릴리는 흰옷을 입고 닷짱의 장례식장에서 상주가 되어 조문객을 맞이한다. 스트립 쇼를 하던 극장 안에서 기타무라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릴리의 사진 세 장이 있었다. 그 사진을 릴리는 닷짱의 관 속에 한 장, 기타무라에게 한 장,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한다. 기타무라는 택시를 타고 이 온천마을 떠난다. 

 

이 소설은 요령 없고 무능한 탓에 정리해고된 삼류 카메라맨과 늙어서 이제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스트립 댄서의 우연한 만남을 그려나가고 있다. 두 사람은 삼류 인생의 동질감을 느끼나, 어느 순간 생의 낭떠러지로 몰린다. 그런데 늙은 스트립 댄서 릴리와 함께 텅 빈 극장을 지켜왔던 닷짱의 자살이 그들의 생을 죽음에서 극적으로 건져내게 된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온천 주변에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수국꽃’의 풍경은 독자들에게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한상훈 문학평론가.                                            © 포스트24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현재 <포스트24> ‘문학 산책’, 계간 <문학미디어> ‘시 계간평’, 계간 <문예운동>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연재 중. 주로 문학공간에 나타난 ‘꽃’과 ‘새’의 이미지에 대해 연구, 발표하고 있다. 그 외 작가론 및 문학특강 다수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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