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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7 -정미경 「밤이여, 나뉘어라」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정미경(1960~2017)의 이상문학상 수상작(2006)인 「밤이여, 나뉘어라」는 여로형의 구조로 이루어진 중편소설이다. 영화와 회화가 캐릭터의 내면세계 속에 녹아있으며 북유럽의 이국적 분위기가 아름답다. 이 소설에는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인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사춘기’ ‘절규’ ‘마돈나’의 그림이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뱃고동 소리는 미세한 입자로 흩어지며 아침 안개와 섞인다. 습기를 머금어 비릿해진 그 소리가 살갗으로 스민다. 들숨을 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린다.”
첫머리의 배경 묘사는 이 소설이 심상치 않게 이야기가 전개됨을 암시하고 있다. 의대를 졸업한 뒤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주인공 ‘나’는 함부르크에서 시사회 일정을 끝낸 뒤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간다. 굳이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은 ‘내 인생의 내비게인션’인 친구 P가 있기 때문이다. P는 학창 시절 동창이며, 의대 동기이다. “나는 한 번만이라도 너를 밟고 지나가 보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즉 고딩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 신화적 존재인 P에게 가서 유럽에서 제법 평가받은 자신의 영화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고국에서 여행가방을 싸며 ‘나’는 오직 P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사 스크랩북을 챙겼다. 배에서 내려 복도로 달려오고 있는 그를 오랜 만에 만난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잘못 말린 바가지 엎어 놓은 것” 같은 형편없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갈 때도 ‘나’는 가난이 아니라 “모든 걸 다 가져본 자의, 제겐 너무 쉬운 생에 대한 희롱”으로 이런 차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곳에서 ‘러브피아’라는 이름의 면역학을 연구 하고 있었다.
“사랑에서 비극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 결국 사랑의 비동시성이야. 한 사람은 아직 뜨거운데 한 사람은 오래전에 불에서 내려놓은 냄비처럼 싸늘한 거지.”
그는 이 약을 먹기만 하면 상대방의 모든 게 사랑스러워진다고 말한다. 환상적이지만 낯설게 다가온다. 그는 의대 다닐 때 탁월한 논문 발표로 대학병원에 남는 것은 누구나 인정했다. 그러나 오만한 태도 때문에 교수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최종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미국 서부의 최고의 의대에 들어가서 LA의 상류층 환자를 상대하는 병원에서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로 불리며 ‘환자의 신’으로 군림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잘나가던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조그만 마을이며 천국처럼 아름다운 ‘운자 크레보’에서 칩거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나’의 물음에 “기억과 욕망을 관리할 수 있게 된 최초의 과학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성이 떨어진 그의 이상론에 ‘나’는 조금씩 의문을 갖게 되고, 그의 아내가 M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다. ‘나’는 학창시절 M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깊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M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녀에 대한 연정이 있던 학창시절, 그녀가 P와 함께 서클룸에 들어설 때 ‘나’는 이미 ‘불안과 분노와 체념’을 느끼고 포기했다. P의 차를 타고 가면서, 과거의 M에 대한 애틋한 추억 속에 그녀가 어떻게 변했을까하고 상상을 해본다. 그의 집에 도착해서 의외로 덤덤하게 P의 아내인 M을 만난다. 그리고 ‘뭉크 미술관’을 P의 권유로 M과 동행하게 된다. 그 시각에 P는 홀로 연구소로 간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속의 회화로 들어서게 된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파리한 소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발가벗은 소녀는 두 팔을 늘어뜨려 벗은 몸을 가리려 하고 있다. 이미 몸에서 움트는 관능의 기운을 감추기엔 팔이 너무 가늘다. 오므린 무릎을 벌리면, 비릿한 첫 생리혈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소녀.”
이 대목은 뭉크의 <사춘기>에 대한 ‘나’의 감상이며, P와 불화 속에 놓여있는 M의 현재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M은 아름다운 이곳 마을에서 오히려 지독한 외로움에 지쳐 있었고, 그렇기에 “그 탁하고 걸쭉한 공기가 그리워”라고 말할 정도로 차라리 황량하고 쓸쓸한 서울을 가고 싶어 한다. <절규>의 방에서 본 그림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죽음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친 듯 공포에 질린 눈. 영원히 닫힐 것 같지 않은 동그란 입술. 핏빛 하늘은 색채가 아니라 비명의 음파처럼 소용돌이치고 배면의 두 남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유유히 걷고 있다.”
이 그림은 신약 연구라는 과제를 안고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P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뭉크의 그림들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과 운명을 동일화시킴으로써 화가의 명화를 단순한 에피소드적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주제에 심도 있게 밀착시킨다. M은 뭉크의 삶과 이 그림들을 연관시킨다. <사춘기>는 일생을 신경쇠약과 죽음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린 ‘뭉크’의 표정이며, <절규>를 보고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남자 뭉크 그림을 보면, 일찌감치 자살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팔십이 될 때까지 살았더라구.”
뭉크가 처했있던 가혹한 현실이 오히려 그가 살아갈수 있도록 붙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M의 말은 어쩌면 남편인 ‘P’에게 시달리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며, 위안인지도 모른다. M은 점차 ‘나’에게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게 된다.
“구멍뚫린 바닥의 차”
그것은 P의 낭만의 산물이 아니라,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생존 모드’라는 말을 듣게 된다. 면역학 연구에 따른 엄청난 재정 지출로 그들 부부는 극도의 가난 속에 허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현실적 상황을 알아채게 된다. 그러한 그들의 가난한 현실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주인공 ‘나’는 조금씩 그동안 자기 삶의 우상이며 신화였던 P의 환상에서 벗어나면서, 그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집에 돌아왔을 때 P는 이미 술에 취해 있었고, 그는 <절규>의 그 섬찟하고 절박한 인간의 모습을 스스로 표현한다. “입을 길고 동그랗게 벌린 채 눈을 부릅뜨고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뭉크의 그림을 온몸으로 재현한다. 그는 뭉크의 <마돈나>는 자기의 마누라인 M이라고 하면서, 벗으면 <마돈나>의 그 표정과 똑같다고 히히덕거린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작가는 신에 도전하고자 했으나 신에 도달할 수 없는 천재적 인간의 자학적 모습을 작가 정미경은 그려나가고 있다.
작가는 뭉크의 회화에 나타난 형상을 인간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의 절박한 몸짓으로 해석하고, P의 신에 대한 도전과 좌절을 거기에 대응시킨다. 즉 ‘기억과 욕망’을 관리하고 조절할 수 있는 면역학 연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P의 오만한 무모함으로 인한 소멸화 과정은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로 인해 “나의 지난 생은 너의 삶의 그림자”였던 ‘나’ 역시 삶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지독한 혼란을 겪는다. M은 P에 대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하게 되고, ‘나’는 그가 심한 알콜 중독자였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나’에게 P는 ‘내 안의 불꽃’이었고 ‘나’의 욕망의 원천이었지만, 결국 내 인생에서 ‘오슬로에서의 사흘’을 후회하고, P가 있는 오슬로에 온 것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작가 정미경은 “생에 있어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고 수상 소감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소설은 P와 M, 그리고 ‘나’의 관계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과 상처, 소통의 불안정성을 매우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지점을 독자들이 확인하게 될 때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현재 <포스트24> ‘문학 산책’, 계간 <문학미디어> ‘시 계간평’, 계간 <문예운동>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연재 중. 주로 문학공간에 나타난 ‘꽃’과 ‘새’의 이미지에 대해 연구, 발표하고 있다. 그 외 작가론 및 문학특강 다수 hansan53@naver.com <저작권자 ⓒ 포스트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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