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5)

-백합이미지② 한 상 훈(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기사입력 2020/06/02 [14:43]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5)

-백합이미지② 한 상 훈(문학평론가)

이지우 기자 | 입력 : 2020/06/02 [14:43]

                                   문학공간의 꽃 이미지 산책 (5)
                                                      -백합②


                                                                                             한 상 훈(문학평론가)


세기말에 쓰여진 대표적 여로형 소설인 윤대녕의 중편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에는 ‘백합’이 어떠한 이미지로 투영 되었을까.
주인공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아폴로 11호가 처음 달에 착륙했을 때 ‘사막’이란 말을 처음 듣는다. 사막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중학교 때 2학년 옆자리의 친구 송갑영만이 “사막은 바다와의 거리 때문에 생기는 거야. 즉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사막은 발생한다는 얘기지.”하고 말해줌으로써 그와 운명적으로 가까워졌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인해 파산을 당한 후 행방불명이 되며, 집은 경매로 넘어간다. 그 친구는 서울로 전학을 간다.


그 후 편지를 주고받다가,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면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신당동의 시장골목을 지나 후미진 곳에 있는 그의 집을 가본다. 엄마와 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그가 쇼팽의 녹턴 8번에서 10번까지 피아노를 쳤고, 그 순간 ‘나’는, 어린 시절에 그와 관심을 가졌던 ‘사막’의 풍경을 보았고, 그와 오랜만에 ‘사막’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작품은 실크로드의 여정이라는 사실성에 사막의 환상성이 중첩되어,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 속에, 인간 존재의 내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사막’은, 흔히 문학 공간에서 상징화되는 도시의 삭막함이나 황폐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사막’ 이미지는 유년기의 환상과 신비함이 배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아노’의 울림은 무엇인가. 음악은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위로와 안식을 주는 예술이다. 그 지점에서 친구의 피아노 소리는 사막의 ‘순수함’과 ‘신비함’의 속성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16년의 세월이 지난 후, 재벌그룹 산하의 증권회사에 다니는 ‘나’는 적당히 소시민적 안락함을 누리면서 살 무렵,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사막’을 가볼 기회가 생겼다. 고비탄과 타클라만칸 사막을 거쳐 가야하는 실크로드에 갈 기회가 온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오랫동안 그 사실을 잊고 있었어. 내가 그토록 그곳에 가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말야.”하고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간신히 아내의 허락을 얻어 회사에 휴가신청서를 제출하고 ‘나’는 11박 12일의 긴 여정을 떠난다. 떠나기 직전에 어린 시절 같이 ‘사막’을 이야기 하던 친구 송갑영한테 전화가 왔는데, 그는 10년 전에 ‘시인’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와 같이 ‘사막’을 가고 싶었으나, 그는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친구가 ‘시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시인’이란 현실을 떠나 이상을 지향하고 있기에, 순수의 공간인 ‘사막’ 이미지와 일맥상통한다. 그런 점에서 ‘사막’의 그리움을 갖고 있는 ‘나’와 친구의 세계관은 닮아있어서, 그와 같이 ‘사막’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서 입원해 있다. 시인으로 살아온 친구는, 현실에 뿌리박지 못하는 삶의 초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나’는 병원의 입원실까지 갔으나, 친구는 웬일인지 “유리를 통해 등 뒤에 와 있는 나를 아까부터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서 일행들과 출발하고, 가는 중간에, 상해에 내려 그곳을 관광하고 실크로드가 시작된다는 서안으로 간다. 거기서 난주행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내리자 비로소 “사막 근처에 왔다”는 느낌을 갖는다. 여기에서 같이 동행하는 여행객 가운데 가장 젊은 스물일곱의 ‘여류 화가’와 가까워진다. 그녀는 “사실은 생리가 오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술이 당겨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낯선 자에게 그토록 내밀한 감정을 속삭일 정도로, 여자의 마음이 쉽게 열릴 수 있을까.


‘여행’은 비일상성의 세계이며, 일상의 나른하고 권태로운 세계로부터 일탈이다. 그러므로 두 캐릭터는 서로 간에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살아왔지만, 같이 여행을 한다는 그 자체로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점과 ‘사막’이라는 여정,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세계관이 있기에 유달리 서로 통한 것이다.


대화 중에 그녀가 ‘사막’을 여러 번 다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막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아마 동성 연애자거나 허무주의자”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녀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상식적이고 일반화되지 못하는 삶의 양식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현실성이 배제된 삶은 ‘순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사막’과 대응되는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그 말에 이어서, 사막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사막이 비어있다는 것” 그래서 ‘사막의 무도’가 시작된다는 다분히 역설적인 말을 ‘나’에게 독백하듯 말한다. 이러한 대화 속에 “카잘스의 6번 연주가 다 끝나 갈 때” 그녀는 꿈결처럼 읊조린다. “사막에 백합꽃들이 피고 있어요. 마침내 무도가 시작되려나 봐요.” 사막의 무도에 ‘백합꽃’과 관련시키면서 설레듯 말한다.


앞에서 ‘나’는 같이 여행 오려던 친구가 ‘피아노’를 칠 때 ‘사막’을 떠올렸듯이, 카잘스의 연주를 신호로 ‘사막’과 더불어 이번엔 ‘백합’이미지가 드러나고 있다. 독자들에게 “백합이 피고 있는 사막”이란 신비스럽고 구체적 형상이지만, 의미의 난해함 때문에 추상적 기호로 다가온다. 제목에 나와 있듯이 ‘피아노’ ‘백합’ ‘사막’의 단어들의 결합은 개연성이 없기에 서로 간에 이질적 의미의 충돌이 빚어내는 추상적 관념의 파편이지만, 도시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이나 ‘신비함’의 동질적 의미로 파악된다.


사막의 ‘백합’ 이미지는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다. 작가 윤대녕은 비일상성의 환상적 이미지로 서사를 그려나간다. 그렇기에 도시 풍경이나 일상적 생활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는 리얼리즘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낯선 공간의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곤혹스러움을 겪는다.


일행은 새벽에 주천역에 내려 호텔로 들어간다. ‘나’는 그녀의 방에 들어가, 육체적 관계를 맺고 들어온다. 저녁에 투르판행 열차를 타면서, 그녀는 앓기 시작하고, ‘나’도 흉흉한 바깥 풍경에 시달리면서 식은땀을 흘린다. 그리고 투르판에 도착하여 지루한 이틀을 보내고, 여행 출발로 일주일째가 되는 날, 비로소 ‘사막’을 보게 된다. ‘나’는 “기나긴 백양나무 길이 끝나는 곳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공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밟으며, 쿠알라를 향해가고, 그곳에서 하루 머물고, 마지막 목적지인 우루무치로 간다. 그리고 모래언덕의 사막을 보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 송갑영이 생각나 몇 번이나 전화를 시도하다가, 연결이 되지 않아 결국 포기한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모래 속을 뚫고 더디게 전진한다. 모래 바람이 차를 덮쳐와 가라앉을 정도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꿈꿔 왔던 사막의 황홀, 그 화사하던 추억은 정작 사막에 와서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난 밤 그녀를 완강히 끌어안고도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듯이, 사막에 오면 사막을 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존재론적 물음 속에, 불안감에 빠진다.

 

쿠차에서의 마지막 날 밤, 그녀와 ‘나’는 둘이서 ‘사막’으로 가게 되고, “달빛에 덮여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연히 바라보게” 된다. 화자는 “사막이 사막 안에서 자꾸 나를 끌어들이려”하는 전율감 속에서, 그녀와 생의 본질적인 물음을 통해 내면적 교감을 나눈다. 두 캐릭터의 정신적 육체적 교감은 일상을 벗어난 불륜의 서사로 가볍게 전개되지 않는다. 문명의 일상성을 벗어난 공간인 ‘사막’에서, 그동안 도피해왔던 ‘생의 본질’에 대한 도전적 응시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친밀감의 표현으로, ‘나’에게 “이끼에 싸여 있는 구근”을 준다. 그것은 백합의 ‘구근’으로, ‘생명’의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사막은 가도 가도 앞이 멀고 뒤가 멀 정도”로 이틀 동안 지치도록 ‘사막’을 보다가 우루무치에 가서, 친구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다시 통화를 했으나 그가 병실에 없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중에, 상해 공항에서 그녀와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다.

 

서울에 돌아온 후, ‘나’는 귀에 이명이 생기고 눈을 떠도 사물이 혼탁하게 보이는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간다. 극심한 쇼크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입원을 한다. ‘사막’의 비일상적 세계에서 도시의 안락한 일상으로 편입되면서 오는 혼란함. 그로 인한 정신적 질환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더구나 ‘나’는 중환자실에서, 친구 송갑영의 환영을 보고나서, 신당동의 친구 집에 전화를 했을 때, 비로소 그가 죽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퇴원을 하고 집으로 왔을 땐, 가족들과 낯설고 서먹서먹했으며, 그 이유가 여류화가 때문인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여러 번 전화를 집으로 했으며, 상해에서 같이 찍은 사진도 가족들에게 들켜버린다. 그 여자의 이름이 ‘이영주’라는 사실도 이제야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가버리고, ‘나’는 혼자 아파트에 남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무엇을 그리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정말 모르겠냐는 말을 한다.


그날 밤, ‘나’는 욕조에 들어가서 자정이 넘게 눈을 감고, 그녀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어느 순간 그녀가 사막에서 주었던 “이끼에 싸여있던 구근”을 떠올리고, 벌거벗을 채로 욕조에서 나와, ‘구근’을 심어놓은 곳으로 간다. “백합은 세 줄기가 솟아올라 그 중 두 개가 피어 있었다. 그것은 사막에서 돌아와 병원으로 실려 가기 전 내가 이끼에 싸인 채로 화분에 묻어 두었던 구근을 비집고 올라온 것이었다.” 백합의 구근이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지상으로 그 줄기가 솟아오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녀가 준 ‘백합’이 꽃 핀 모습은, ‘사막’에서 있었던 ‘비일상적’ 세계의 이어짐이, 현실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백합은 희미한 달빛 속에서도 염염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라고 말한다. “유년에 못다 흘리고 남은 눈물이, 흐린 날 산에 올라 보게 되는 머나먼 한 줄기 강물처럼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한 잠시 내 눈에 문득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피아노의 환영이 비쳐 들었다.” 주인공은 순수하고 순결했던 어린 시절의 삶을 떠올리고, ‘피아노’를 치던 친구를 그리워한다.

 

소설이 리얼리티와 환상성을 기법으로 작업하는 예술양식이라면, 작가 윤대녕은 그 경계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환상적 리얼리즘의 기법을 통해 작품의 미적 구도를 높이고 있다. 이 글은 때로는 자연스러운 서사의 흐름이, 작가가 설정해 놓은 은유적 이미지로 인해 충돌을 일으키면서, 독자들은 중심 주제의 해법을 탐색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누가 나를 메아리 쳐 불러,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내가 거미처럼 사지를 벌리고 달을 끌어안고 있다.” 이 부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주인공은 온 몸으로 달을 안고 있는 행위를 통해, 일상이라는 현실 속에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년기의 ‘사막’의 환상 속에서 몸부림치는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 지점에 있었기에, ‘가족의 해체’를 가져온 것이다. 당연히 ‘나’의 일상적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나’의 삶은 그녀가 말했듯이 “소금 포대를 잔뜩 실은 당나귀”의 삶에 해당된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중국 상해, 서안, 난주, 주천, 투르판, 쿠차, 우루무치의 실크로드의 여행을 통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보고 오는 긴 여정은, 낯설고 환상적인 유년기의 공간이며, 주인공이 서울이라는 일상적이고 안락한 도시 공간과 불화함으로써, 내밀한 존재의 물음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있는 삶의 양식을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백합’ 이미지는 쉽게 떠올리게 되는 ‘순결’이나 ‘순수’의 아름다움으로 많이 표현되면서도, 문학 공간에 ‘생명’의 이미지로서, 작가의 서사 전략적 차원에서 차용되기도 한다.

 

 

 

  

   ▲한상훈 평론가

 

 [약력]
 □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 출간.
 □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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