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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20)

-독수리2.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기사입력 2023/05/18 [19:26]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20)

-독수리2. 한 상 훈 (문학평론가)

이영자 기자 | 입력 : 2023/05/18 [19:26]

                         

  ▲독수리.                                                                                                  © 포스트24

 

                              문학공간의 ‘새’ 이미지 탐색 (20)

                                                   -독수리2

 

                                                                                                      한 상 훈 (문학평론가)

 

「파이프라인」(2021)과 「쌍화점」(2008)으로 감독한 바 있는 유하(1963~) 시인의 「생」에서는 ‘독수리’가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는지 감상해 보자. 

 

천장(天葬)이 끝나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독수리떼

 

허공에 무덤들이 떠간다. 

쓰러진 육신의 집을 버리고

휘발하는 영혼아 

또 어디로 깃들일 것인가

 

삶은 마약과 같아서 

끊을 길이 없구나

 

하늘의 구멍인 별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때 

새들은 또 둥근 무덤을 닮은

알을 낳으리

       -  유하, 「생」 전문

 

‘천장’(天葬, sky burial)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독수리들의 먹이로 내주는 장례법이다. 티베트에선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발가벗겨서 산 중턱까지 이동한다. 그곳에서 집도자는 칼로 시체를 적당히 해체시켜서 새들이 잘 먹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들은 간단히 식사를 하곤 새들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다. 이것은 하늘을 신성시하는 티베트인들의 장례 풍속으로 ‘조장’(鳥葬)이라고도 한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독수리떼”라는 표현처럼 독수리도 때론 다른 새들처럼 무리를 지어 다닌다. 보통 혼자서, 또는 암수가 같이 지내기도 하지만, 지상에 먹이가 넉넉하게 있을 때에는 몇 백 마리가 일시에 모여들어 함께 먹이를 먹는다. 그리고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을 토해내기도 한다. “허공에 무덤들이 떠간다.”는 것은 독수리들이 시신을 쪼아 먹고나서 하늘로 날아가는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다. 

 

시적 화자는 독수리들에 의해 하늘로 “휘발하는 영혼”이 다시 어딘가에 깃들어 ‘생’으로 이어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시는 다분히 불교의 윤회사상을 연상하게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윤회사상은 인과응보에 바탕을 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에 착하게 살게 설득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물론 이 시도 죽음을 뚫고 또 다른 생명으로 부활하는 소멸과 생성의 과정을 그려나가고 있으나 ‘생’의 유한성에 대한 종교적 극복이나 위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도피의식이나 두려움을 강조하고 있지도 않다. 단지 하늘을 숭상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장례문화로, 고지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인 죽음에 대한 거룩한 의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찢어진 몸을 쪼아대는 독수리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는 이 시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이 우주의 순환논리 속에 하나로 돌고 돈다는 것. 그러나, “삶은 마약과 같아서 /끊을 길이 없구나”라는 표현처럼 현대인들의 탐욕적이고 원초적 욕망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은근히 담고 있다. 또한 “새들은 또 둥근 무덤을 닮은/ 알을 낳으리”에서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과 같은 삶의 반복에서 환기되는 생의 허무를 짙게 드러내고 있다. 

 

초라한 독립문 근처를 맴돌다가

우울한 날개를 펴들고

나는 북악(北岳)을 넘는다. 

 

꽃구름 권태로운 봄날은

노송 삭은 가지에 도사리고 앉아

멀리 메아리져 퍼지는 포성을 듣는다.

 

누구도 알 배 없는 미궁은

오불꼬불한 나의 피어린 창자 속.

그러나 조상쩍부터 아예

프로메테우스의 날간같은 것은

쪼아먹는 적이 없다.

 

나의 외동딸 「자유」는 멀리 외로이

브라질 같은 데로 이민을 떠났고,

이 절벽 속 같은 고독 속에

내 홀로 이 강산을 지키며 산다.

      - 양명문, 「독수리의 비가(秘歌)」 부분

 

‘독수리’에 시인의 내면적 감정을 담았다. 봄날에 푸른 하늘을 선회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현실에 대한 시인의 고뇌를 그려나가고 있다. ‘초라한 독립문 근처’를 돌고 있는 화자의 마음은 ‘우울한 날개’가 말해주듯이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봄날은 권태롭고, “노송 삭은 가지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푸르른 봄날이지만 혼탁한 사회 현실과 분단의 민족을 내다보면 “오불꼬불한 나의 피어린 창자”가 말해주듯이 괴로운 것. 그렇다고 남들처럼 조국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기는 싫다. 맘에 들지 않는 한반도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내 나라 내 민족 아닌가. 

양명문(1913∼1985) 시인은 1950년대 초 1.4 후퇴 때 북의 고향을 버리고 내려온 시인이기에, 조국을 사랑하는 감정은 남다르다. 친구나 이웃들이 우리의 사회 체제와 현실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떠들어도 시인은 “이 절벽 속 같은 고독 속에/ 내 홀로 이 강산을 지키며” 살고 싶은 것. 시인의 내적 고뇌가 시공간에 관류하고 있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정한모, 「나비의 여행」 부분

 

이 시에서 아가는 ‘나비’이며, 아가의 꿈은 ‘나비의 여행’을 뜻하고 있다. 현실과 꿈의 대립 구도를 통해 ‘아가’가 상징하는 순수한 인간 세계의 추구를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1960년대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와 함께 대표적인 문명비판적인 작품으로, ‘독수리’는 ‘공포’라는 수식이 붙어있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밤의 어둠’과 ‘화약 냄새’ 등의 이미지와 조응하면서 부정적 정서의 극점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독수리’는 날짐승 중에서 날카로운 눈빛과 부리를 지닌 맹금류이기에 때로는 부정적 또는 공포의 대상으로 시인의 문학적 상상력 속에 포착된다. 

박두진 시인의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강2」)나 최승호 시인의 “대머리는 미국의 국조이다/ 흰 대머리의 수리,/ 복면을 쓴/ 백악관의/ 두리번거리는 파란 눈들,”(「대머리 독수리1」), 신현림 시인의 “머릿속에 독수리가 날고 자동차가 달린다./ 자동차의 스피드, 광고의 스피드, 농구의 스피드/ 스피드의 황홀만이 두려움을 마비시킬까”(「세기말 부르스 1」)과 같은 구절 역시 마찬가지다.

 

티벳인들의 장례를 소설 속에 투사시키고 있는 유금호(1942~)의 단편 <몇 종류의 새, 혹은 꽃>을 살펴보자. 

 

그날 오랜만에 만난 광우하고 동네 소주집에서 꽤 마셨습니다. 

“티베트 쪽 조장(鳥葬) 풍습 들어봤지? 시체를 독수리한테 내주는 거야,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바위산까지 운반해 가서 시신을 조각내서 대머리독수리들이 모여드는 바위산까지 운반해 가서 시신을 조각내서 대머리독수리들이 먹도록 하거든...들짐승이 먹도록 들에 버려두는 것보다 독수리에게 주는 것이 하늘에도 가깝고 더 입체적이니까 한 수 위가 될지도 모르지. 장자는 그걸 간파해서 임종 자리에서 제자들이 장례 절차를 묻자, 땅 위에다 자신의 시신을 들판에 그대로 버리라 했는지도 모르겠어. 땅 위의 짐승이 먹는 거나, 땅속의 벌레들이 육신을 파먹느거나 다를 게 뭐 있느냐는 그 사고에 나는 동감이야.”

30년 전의 유년으로 회귀하던 우리는 흰머리가 섞인 서로의 머리칼을 확인하고 자연스레 죽음과 장례, 그런 쪽의 화제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

       -유금호, <몇 종류의 새, 혹은 꽃>에서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새 잡기의 친구인 광우가 회사 일로 영국에 갔다가, ‘아르카에오프테릭스마크로우라’라는 쥐라기 시대의 컴퓨터로 복원된 시조새 화석의 칼라사진을 ‘나’(화자)에게 주면서,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새 모티프의 전형적인 소설이다. 

아버지의 광적인 솔개 사냥, 배꽃 냄새를 풍겼던 어머니의 식물적 삶과 죽음이 후경화되어 나타나고, 새 잡기 시절. 광우의 동생 애희와 화자인 ‘나’의 사랑이 과거와 현실 속에 중첩된다. 거기에 현재 시점에서 잡지사 여기자인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이혼이 여러 가지 새 이야기와 맞물리는 흥미진진한 소설로,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에 몰입된다. 

작가는 새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상징적 기법, 인물들의 삶의 대비를 통해 근원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인용된 윗글은 바로 독수리떼들이 조각낸 인간의 육신을 순식간에 먹어버리는 티벳인들의 장례법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장면으로, 유하 시인의 「생」처럼, 소멸과 생성의 과정을 통해 욕망에 가득찬 현대인들의 덧없는 삶을 드러내고 있다. 

 

 

 ▲ 한상훈 평론가.                                            © 포스트24



<약력>

□서울 출생, 1986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평론집 『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현대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지평』

□『문학의 숲에서 새를 만나다』 『아웃사이더의 시선』 등을 출간하였다.

□경기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hansan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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